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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크로스] 오빠의 긍지, 가수의 책임감, <오빠, 남진> 남진
정재현 사진 최성열 2024-09-12

목포 부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풍각쟁이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수로 데뷔했다. 베트남전에 파병돼 2년간 복무했고, 전역 후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노래 <님과 함께>를 발매해 대한민국 가수 중 최초로 ‘오빠’라 불렸다. 1980년대 군사정권의 정치적 탄압을 받아 낙향, 도미했지만 이후에도 <빈잔> <둥지> 등이 두번이나 역주행 히트하며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 가수로 무대에서 절정의 가창력을 뽐낸다. 영화래도 ‘이건 설정 과다 아니야?’라는 소리를 들을 법한 이 서사의 주인공은 가수 남진이다. 영화 <오빠, 남진>은 올해 6월 출간된 동명의 도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근현대사, 대중음악사, 팬덤문화사에서 남진이 차지하는 좌표를 짚고 그가 각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선도했는지 설명한다. 여전히 ‘영원한 오빠’, ‘원조 오빠’로 소개되는 일이 가장 좋다는 가수 남진과 <씨네21>이 나눈 대화를 전한다.

- 한국 대중가수 중 최초로 ‘오빠’ 호칭을 얻으셨습니다. 조직적인 팬클럽도 처음 가지셨고요. 1970년대만 해도 좋아하는 스타를 ‘오빠’, ‘언니’라 부르는 게 낯선 시절이었다고요.

= 그땐 관객들이 무대가 끝나도 박수를 안 치던 시절이에요. 싫어서가 아니라 쑥스러워서요. 그래서 다들 가수를 오빠라 부르는 걸 부끄러워했을 거예요. 그러다 나를 시작으로 오빠 부대가 생긴 거죠. 한국 가수 중 처음으로 오빠 소리를 들은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껴요. 그래서 행사에서도 사회자에게 웬만하면 ‘영원한 오빠’, ‘원조 오빠’ 정도로 소개해달라 요청합니다. 그외의 다른 수식을 붙일 거면 그냥 붙이지 말라고 하죠.

- 데뷔 초 선생님은 새로운 유형의 가수, ‘신가다’ (しんがた)라고 불렸습니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사람이 느끼는 짜릿함과 아무도 닦아두지 않은 길을 앞장서 걷는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시발점에 서 있으면 매사에 조심할 수밖에 없지요. 그땐 더 열심히 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다는 책임감이 컸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제 위로는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선배들이 거의 안 계세요. 이 나이까지 노래한 사람이 몇이나 있어요. 예나 지금이나 팬들을 위해서라도 지루한 가수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써요. 다행히 내겐 트로트, 로큰롤 등 많은 장르의 노래가 있는 게 큰 자양분이 돼 오늘날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한 장르만 팠다면 금방 지겨워졌을 거예요.

- 말씀하신 대로 선생님의 디스코그래피엔 트로트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 선생님이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음악가들도 로큰롤이나 블루스에 정통한 팝 뮤지션들이에요. 그런데 유독 ‘트로트 가수 남진’이라 소개되는 경우가 많으십니다.

=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죠. 내 음악엔 트로트도 있지만 록도 있고 고고도 있어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트로트라는 장르에 대해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어요. 트로트는 멜로디보단 리듬을 지칭하는 용어예요. 폭스트롯에서 연원한 음악이니까요. 그런데 트로트라 통칭하는 다수의 노래는 멜로디가 ‘뽕짝’인 데 비해 리듬은 트로트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일본에서 트로트가 왔다고들 하는데 정작 일본에선 트로트 리듬의 곡을 엔카라 부르잖아요? 당연해요. 트로트는 리듬이지 음률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말하는 트로트 리듬의 곡은 불란서의 샹송이나 이탈리아의 칸초네에 가깝다고 봐요.

- 매주 방송국 라이브쇼에서 활약한 선생님을 두고 ‘50년 전 남진은 탤런트적인 가수였다’라는 평가가 영화에 등장합니다.

= 데뷔할 때만 해도 방송국이 KBS밖에 없었어요. 방송이라고 할 만한 건 전부 라디오였죠. 그래서 당시 가수들은 오디오에만 치중해도 괜찮았어요. 내가 한양대에서 연극을 전공해서 그런지 몰라도 3분30초 노래를 하는 건 1시간 반 러닝타임의 영화에서 연기를 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기하듯 노래를 했는데, 마침 텔레비전 방송국이 다수 개국하는 비디오 시대가 오면서 각광을 받았죠. 화면에서 노래할 줄 알았으니까요.

- 한국영상자료원 기록에 따르면 <오빠, 남진>을 포함해 총 76편의 영화를 찍으셨습니다. 그중 1967년에서 1977년 사이에 무려 74편의 영화가 개봉했어요. 히트곡을 영화로 만든 기획 영화도 있지만 김수용, 임권택, 이두용 등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감독들의 초기작에도 모두 배우로 출연하셨어요.

= 김수용 감독의 <수전지대>(1968)는 생생해요. 내 노래랑 아무 상관없는 염전 머슴들의 이야기였어요. 솔직히 그땐 인기 때문에 이런저런 영화에 나왔지 연기가 좋아서 출연을 결정한 건 아니에요. 그럭저럭 소화할 정도는 되니까 했겠죠. 연기를 잘하진 못했어요.

- 영화 말미 “내 삶이 음악이다”라는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 데뷔 초만 해도 나에게 음악은 취미였어요. 마침 직업이 필요했던 시기라 운과 때가 맞았죠.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음악을 하다 보니 가수가 나의 천직이고 노래가 나의 재능이라는 걸 느껴요. 그래서 각별한 만큼 나를 갈고닦게 되고, 외길 인생에 집착 내지 집념을 갖게 돼요. 하늘이 주신 재능에 보답하려면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끝까지 노래할 수 있게 근면하게 노력하는 일은 나를 지금껏 사랑해준 팬들, 이 길을 오래 걸은 나에 대한 보은이기도 해요. 지금도 무대에 서기 위해 꾸준히 운동하고, 잠들기 전 매일 서너 시간씩 장르 구분 없이 음악을 들어요. 요샌 스마트폰도 있으니 음악 듣기 얼마나 편해요. 단순히 음악만 듣지 않고 동영상으로 그 음악을 소화하는 가수의 표정이나 몸짓까지 연구합니다.

- 올해는 햇수로 데뷔 60년, 내년엔 데뷔 60주년을 맞이하십니다.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 계획 없어요. 그저 좋은 곡을 받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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