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장에 다녀왔다. 소와 돼지를 죽이는 곳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도살장은 입구에서부터 외부인 출입이 불가능한데 이곳은 축산물시장과 접해 있어서인지 도살장 부지만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소와 돼지를 직접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구경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평소 습관대로 어슬렁거리며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느닷없이 돼지를 보았다. 소리가 먼저였을까 모습이 먼저였을까. 트럭에서 내리지 않으려는 돼지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 직원들은 전기봉으로 보이는 작대기를 들고 그들을 끌어내리려 애쓰고 있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축산동물이라 규정된 존재들을 만나는 순간에는 현기증이 난다. 평소 가까이서 볼 일이 없으니까. 마치 야생에서 코끼리나 기린을 보는 것 같은 경이감도 든다. 그 경이감은 이내 비참함으로 바뀌지만. 돼지들은 도살 전 대기하는 장소인 계류장으로 모두 들어갔다. 지금 비록 카메라를 들지는 못하더라도 이곳에 좀더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트럭에 남겨진 작고 검은 돼지를 보았다. 주황색 포대 위에 누운 채, 아마 인간에 의해 던져졌을 자세 그대로, 몸은 흠뻑 젖었고 숨은 곧 넘어갈 듯 헐떡이고 있었다. 포대 안에도 작은 돼지들이 구겨져 있었다.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살아 있었다. 돼지가 숨 쉴 때마다 그의 몸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모습이 내 시야에 클로즈업됐다. 돼지는 괴로워보였다. 아니, 너무너무 괴로워보였다. 가쁜 숨을 내쉬며 눈만은 크게 뜨고 있었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알고 싶다는 듯.
공동 연출자인 친구는 돼지의 눈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다. 돼지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눈에 띄지 않게 머물다 가려 했는데 결국 수송 트럭 기사에게 외쳤다. “여기 돼지 살아 있어요!” 돌아온 대답은 “죽었어요”였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아니 살아 있는데? 괴로워하고 있는데? 다시 현기증이 났다. 왜 아무도 이 돼지를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살아 있는데 왜 죽은 취급을 하는 걸까. 그런데 도살장 앞의 돼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지? 차라리 빨리 고통을 끝내주는 게 돼지를 위한 일이 아닐까? 왜 빨리 죽여주지 않는 걸까? 인간이었다면 최소한 개나 고양이었다면 그를 구해주는 손길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일단 무조건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꺼냈다. 이제 돼지는 몸을 비틀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더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것 같았다.
2분 정도 찍었을까. 도저히 더 찍을 수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었다. 그렇다고 돼지를 구할 수는 없었다(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모습을 찍기라도 해서 알려야 한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존재 앞에서 카메라를 대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그래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기록해야만 한다.
결국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울고 말았다. 내가 좀 전에 본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강하게 실감이 났다. 무력감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비슷한 감정을 5년 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 구미와 서울을 오가며 영화 촬영을 할 때였다. 어느 날 밤 사람들과 골목을 걷다가 고양이의 기괴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쳐야 했는데 자면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던 나는 다음날 새벽에 다시 그 골목을 찾아갔다. 온몸의 털이 지저분하게 굳어 있는 처참한 몰골의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고양이는 전날처럼 또 울기 시작했다. 자신 지금 괴롭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쩔쩔매면서도 잠시 후면 있을 촬영을 제칠 결정은 끝내 내리지 못했다. 바로 발길을 떼지 못하고 골목 반대편에서 쳐다보다가 사진 한장만 찍고 돌아서고 말았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에서 갑자기 고양이의 모습이 떠올라 울고 말았다. 내가 울어서 놀랐다. 점점 비인간 동물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던 와중에 겪은 그날의 일은 잊히지 않는다. 이후 나는 보다 적극적으로 내가 사는 동네의 아픈 고양이들을 도와주게 되었고, 그러다 또 몇년 뒤에는 친구와 축산동물이라 규정되는 동물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도살장에서 돌아오고 며칠간은 그 어린 돼지를 안고 도망가는 상상을 자주 했다. 축산업이라는 거대하고 견고한 시스템은 나를 더욱 무력하게 한다.
이제 나는 비인간 동물을 신경 쓰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부당하게 느껴진다. 너무나 가볍게 다뤄지는 그들의 삶과 죽음이 나에겐 더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소, 돼지, 닭의 삶에 별 관심이 없던 내가 어떻게 이제는 고기를 보면 살아 있는 동물의 이미지가 따라붙는 몽타주를 갖게 되었을까, 가끔은 신기하다. 최근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동물들에 관하여>다. 스웨덴의 한 수의사가 도살장에서 85일간 일하며 쓴 하루하루의 기록이다. 저자는 돼지들이 “고기가 되러 가는 길에도 매를 맞는” 것을 보며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그 돼지의 눈빛이 밤이 되어도 잊히지 않는다”고 쓴다.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친구나 지인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기 힘들다. 다들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한다. “너무해. 그런데도 거기서 일하고 싶어? 너무 일찍 일어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다 말해 봐. 동물들 이야기 다 해줘.”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동물들에 관하여>, 리나 구스타브손 지음, 장혜경 옮김, 갈매나무 펴냄, 2021, 95쪽)
대부분은 도살장 앞에서 만난 동물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아 한다. 흔히 말하는 불편한 진실이니까. 만약 누군가가 우리에게 “너희가 본 동물들에 관해 뭐든 말해 달라”고 말해준다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야기하고 싶다. 도살장 앞에서 온몸으로 괴로움을 드러내며 허공을 응시하던 작고 검은 돼지의 눈빛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