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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연의 이과감성] 과학과 윤리, <오펜하이머>
임수연 2024-07-25

전공이 물리학인데 직업은 영화기자라고 하면 십중팔구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도 쉽게 이해하시겠어요!” 실제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이 개봉할 때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물리학 지식’ 같은 제목을 단 유튜브 콘텐츠가 쏟아지는데, 아마도 상대성이론을 잘 알아야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로 나온 기획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는 물리학을 잘 알지 못해도 재미있게 볼 수 있고(한국 관객수 1034만명이 모두 상대성이론을 잘 아는 건 아닐 테니까), 그래서 그가 현학적인 수사만 늘어놓는 게 아닌 뛰어난 대중영화 감독이라는 말도 흘러나온다.

2023년 개봉한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지만 수소폭탄의 반대자이기도 했던 J.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인생 가운데 특정 시기를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극비로 진행됐던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고 성공시키기까지, 그리고 1954년 원자력에너지위원회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가 취소되던 때다. 그 과정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막스 보른 등 특히 전공자라면 익숙할 이름들이 대거 등장하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전작이 그랬듯 물리학자들에게 꼼꼼한 자문을 받아 영화 내적 세계를 완성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과학 공식보다는 인간 내면의 다면성과 과학자의 윤리적, 사회적 책임, 전후 매카시즘이 훨씬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에 핵분열 원리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도 영화를 감상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고도 한다. 동시에 ‘핵분열’의 컬러 파트와 ‘핵융합’의 흑백 파트로 나뉜 챕터와 플롯 구조, 물의 파동으로 시작해 많은 관중의 발구름과 박수 소리가 중첩되고 원자폭탄의 파괴력으로 이어지는 사운드와 이미지의 몽타주는 물리 이론을 알아야 더 감각적으로 즐길 수 있기도 하다.

<오펜하이머>에 나오는 원자폭탄의 원리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숱하게 설명됐기에 이 지면에서는 간단한 설명으로 대체한다. 1938년 독일 과학자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오토 한은 질량수가 큰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원자핵이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원자폭발로 생기는 질량 결손만큼 에너지(E=mc²,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를 따름)를 방출시키는데, 슈트라스만과 한의 실험에서는 2만 볼트의 에너지가 생성됐다. 당시 과학자들은 뉴스를 보면서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우라늄 하나가 분열하면서 나온 중성자가 또 다른 우라늄을 분열시키고 또 분열시키고 또 분열시키고…. 그렇게 폭탄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일이 가능하겠다고. 과학자들이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확인한 것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당시 독일에는 원자구조를 누구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하이젠베르크가 있었다. 미국은 나치가 먼저 핵폭탄 개발에 성공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폭탄 제조에 성공해야 한다고 판단,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극비리에 준비한다. 미국은 1945년 7월16일 트리니티 핵실험을 통해 그들이 진짜 폭탄을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으로 이어진다.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책임자였다.

<오펜하이머>에는 몇 가지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이를테면 로스앨러모스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된 여러 시설 중 하나였고, 컬럼비아, 시카고, 버클리대학교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원자폭탄 제조를 실행에 옮기는 일을 지휘했다(마치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가 모든 프로젝트를 이끈 것처럼 나온다).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맷 데이먼)이 원래 로스앨러모스의 총책임자로 임명하려 했던 인물은 영화에서 조시 하트넷이 연기한 어니스트 로런스였다. “공산주의자로 의심받는 호사가에 바람둥이”였던 친구 오펜하이머를 대신 적임자로 추천한 인물이 바로 로런스다. 한편 오펜하이머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섬유 회사 임원이었고, 그의 집에는 운전기사, 프랑스인 가정교사, 세명의 가정부와 세점의 반 고흐 그림이 있었다. 16번째 생일 선물로 28피트짜리 요트를 받았다. 오펜하이머는 그가 휴가를 보내던 저택에서 말을 타고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곳, 뉴멕시코 북부 로스앨러모스에 비밀 기지를 구축했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과학자들을 한데 모으며 “보안보다 효율성에 집중해야 이길 수 있다”며 미국의 모든 산업력과 혁신 기술을 철도로 연결하고 같은 시공간에 학교, 상점, 교회 등 모든 것이 갖추어지게끔 건설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이곳엔 극장이 있고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으며 토요일 밤마다 댄스와 피아노 독주회, 일요일에는 하이킹과 승마가 마련됐다. 첫해에만 80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복스>는 “많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회고록에서 로스앨러모스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극비 정부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전쟁 전 여름 캠프를 훨씬 더 연상시킨다”고 묘사했다. 독일 나치는 이미 1942년에 핵폭탄 프로그램에 반대하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그들이 먼저 핵 개발에 성공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전체 GDP의 0.4%를 지출하며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시킬 이유가 없었다. 오펜하이머의 보좌관이자 맨해튼 프로젝트의 공식 역사가 데이비드 호킨스에 따르면 레슬리 그로브스가 이미 1943년 말에 오펜하이머에게 나치가 핵폭탄 프로그램에 돌입하지 않을 것이라 전했고, 오펜하이머는 1944년 말 “전쟁과 원자폭탄 경쟁이 끝에 치달으면서 과학자들이 다른 시민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낼 권리가 없으며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전쟁이 끝나면 다음 전쟁은 핵무기로 치러질 것”이라 말한 바 있다고 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50~60년대는 대부분 카리브해 세인트존섬에 있는 휴가용 저택이나 요트에서 보냈다. <오펜하이머>는 실제 오펜하이머가 가졌던 훨씬 복합적인 층위를 쳐내면서 대중영화로서 몰입력을 얻어냈지만, 덕분에 그가 극 중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호소한 대로 보다 쉽게 “순교자”가 될 수 있는 권위를 얻는다.

영화는 감독이 잡은 프레임과 편집에 따라 권력이 부여되는 매체다. 특히 오펜하이머의 1인칭 내레이션과 그를 중심에 두고 나머지를 포커싱 아웃하는 구도를 즐겨 쓰는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 전체와 윤리적 죄책감의 주체가 그가 되게끔, 그것도 할리우드 거대 자본과 마케팅을 타고 전세계인들이 인식하게끔 유도한다. 공교롭게도 소수 엘리트주의에 복무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오펜하이머>의 소재인 원자폭탄은 자연에 존재하는 우라늄 중 0.7% 정도 존재하는 유일한 핵분열 동위원소, 즉 희귀한 물질을 재료로 한다. (이보다 더 위협적인 수소폭탄이 자연에서 가장 흔한 수소에서 시작되는 것은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관객이 <오펜하이머>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배경 지식이 있다면, 카메라라는 권위에 가려져서 지워진 역사적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감상하는 쪽이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핵전쟁과 죽음 이후에도 프로메테우스적 순교자로 권위를 얻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알아가기에도 훨씬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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