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간에 중심이 몇개 있을까요?” 몇년 전 한 민주노조의 워크숍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결국 편집에는 쓰이지 않은 그날의 촬영본이 문득 떠올라 외장하드 폴더를 열었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이 공간에서 각자 중심, 가운데라고 생각하는 곳에 서보라고 말한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맞히려고 노력 안 해도 돼요.”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간의 끝에서 끝까지 거리를 재는 사람이 있고, 무대 위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벽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 혼자 서 있기도 하고 무리 지어 모여 있기도 하다. 이제 각자 자신이 왜 이곳을 중심으로 삼았는지 설명한다. 저마다 중심에 대한 정의가 다르고, 중심을 잡는 기준도 다르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사실 오랜만에 그날의 촬영본을 열어본 건 이 말을 다시 보고 듣고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각자 왜 거기 섰는지는 알겠는데, 그런데 거기가 계속 중심이라고만 생각하고 살아도 괜찮을까.”
그날 서울인권영화제 폐막식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옮겨볼 기회를 오랫동안, 아니 평생 갖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학교 기숙사에서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던 나는 한 시간 후 인권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왠지 가보고 싶었다. 대추리 투쟁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했다.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영화가 시작된 뒤였다. 안내인이 극장 문을 조용히, 조심스럽게, 반쯤 열어주자 나는 몸을 숙여 빨려 들어가듯 안으로 진입했고 내부는 환한 스크린, 그 앞에 어른거리는 관객들의 모습, 열기, 침묵, 한때 분명 일어났던 현장의 모습과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부수지 마세요. 부수지 마세요.” 영화 속 활동가의 호소에 사람들이 울었고 나도 울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밤새도록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대추리 투쟁의 이유와 이 싸움을 비난하고 지지하는 기사를 번갈아 읽었고, 다음날 평택의 대추리 현장으로 혼자 찾아갔다.
“내가 변했는데?” 내가 변했잖아. 잊을 만하면 맞닥뜨리는 독립영화의 쓸모를 묻는 질문에 나는 그냥 그런 답을 해버린다. 사실 그것만큼 정확한 대답도 없다. 영화가 아니었다면, 독립영화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세상. 물론 영화가 내 중심을 이동시켜준 전부는 아니었지만 영화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저 내가 서 있는 곳만 확인하는 데에 그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영화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소위 독립다큐멘터리라는 것을. 여기서도 중심 옮기기는 계속된다. 처음에는 인권영화제에서 보았던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들에 끌렸다면 어느 순간 대의보다 사적이고 사소한(사소하다고 여겨지는) 이야기에 끌리고, 하다 보니 내용보다는 자유분방하고 비관습적인 형식을 가진 화들에 홀리고, 그랬다가도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목적이 분명하고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변하지 않을 무엇은 있을 것이다. 내 안에서 온갖 일들이 발생하고 내 모양을 변형시켜도 오롯하게 남아 있을 무엇. 그게 또 내가 다큐멘터리를 계속 만들고 싶게끔 하는 힘일 테고.
내가 다큐멘터리 작업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현장’이 있어서다. 이때 현장이라는 건 물리적인 장소이면서 동시에 내 문제의식과 앞으로 파생될 질문들을 모두 아우른 말이다. 중요한 건 특정한 관심과 질문을 갖고 시작하더라도 구체적인 현장에서 계속 흔들린다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아야 하고, 원하는 것에 너무 매달리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걸 다 열어두고만 있다면 작업을 마무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일단 나를 활짝 열어둔 채 현장으로 갔다가 다시 고독한 내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복기하고 생각하는, 이 과정이 괴롭지만 재밌다. 중심을 잡았다가 다시 중심을 흔드는 일의 반복이랄까. 마치 내가 좋아하는 인서트 숏의 역할처럼. 주요 이미지들 사이에서 스토리를 끈끈하게 보완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뜬금없이 불쑥 솟아올라 시선을 교란하더니 기어코 마음에 남기기도 하는.
어쩌다 보니 올해는 두 현장을 다니고 있다. 한곳은 재개발 예정 중인 성매매 집결지이고, 또 하나는 축산동물들이 있는 곳이다. 각각의 작업이 지향하는 바나 스타일은 다르지만 하루는 이 현장, 또 하루는 저 현장을 다니다 보니 머릿속에서 두 가지가 제멋대로 뒤섞일 때가 많다. 어떤 점에서 둘 다 사라질 운명이다. 아니다. 운명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으니까. 전자는 뉴스에 나오는 방식대로 이 구역을 촬영하거나 개인의 사연을 전달하고 싶지 않다, 후자는 축산동물 하나하나의 모습을 잘 드러내어 그들의 지위를 올리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적어놓고 보니 좀 거창하다만, 쓰다 보니 새삼 초심을 떠올릴 수 있었고, 초심쪽을 향해 돌아보니 내가 점점 더 작업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장에서 알게 된 몇몇 사람들과 끈끈하고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장소에도 정이 많이 들었다. 내년이 지나면 풍경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인연이라는 말도 사치스러운 비인간 동물들과의 만남이 계속되고 있다. 몇 시간 뒤면, 며칠 뒤면 죽는 존재를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래도 공동 연출자인 동료가 있어서, 흔한 말 그대로 감정을 나눌 수 있다.
왜 그냥 사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기어코 영화로 만들고 있을까. 막막할 때도 있다. 많은 창작자들이 그렇듯 완성할 수는 있을까 싶어서.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아서 누군가의 중심을 아주 조금이라도 옮겨볼 수 있는 영화로 완성해보고 싶다. 두 작업을 시작하는 데 영향을 끼친 몇년간의 내 관계, 노동, 활동, 일상 등이 있다. 그리고 지금 현장에서 겪는 일들이, 카메라로 보고 듣는 것들이 다시 내 삶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모든 게 한창 진행 중인 작업의 과정을 앞으로 이 지면에서 나누고 싶다.
어차피 나는 나라서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알아채기 어렵고, 내가 인간이라서 인간 중심적인 시각을 버리기가 힘들다. 그래도 애쓴다. 흔들리고 중심을 잡으면서 어떻게든 믿게 된 것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더 나은 쪽으로. 일단은 마음을 활짝 열고 오늘도 현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