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탈하려는 남자들을 피해 옥연(정은선)은 금줄을 넘어 금지된 숲속으로 도망친다. 이 숲에 들어가면 ‘메아리’라는 도깨비를 만나는데, 도깨비는 사람의 신발을 뺏어 신고 똑같이 외형을 바꾼 뒤 결국 그를 잡아먹어버린다는 소문이 있다.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매한가지라며 자포자기한 옥연 앞에 도깨비가 나타난다. 혼례복을 입고 옥연의 말을 똑같이 읊는 메아리는 옥연과 가깝게 지내던 방울 언니(김평화)의 모습과 다름없다. 결혼할 당시 방울의 환복과 달라진 게 없는 도깨비를 보며 옥연은 상황을 파악하고 슬퍼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재학 중인 임유리 감독은 자신의 첫 단편 <메아리>로 제77회 칸영화제 라 시네프(전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됐다. 차기작 촬영으로 인해 여정에 함께하지 못한 배우들에게 “다른 영화로 또 같이 칸에 오자”고 말했다던 이 당찬 신인감독의 미래가 기대된다.
- 첫 단편으로 칸영화제에 초청된 소감은. 상영 전 관객 앞에 나서서 인사말을 전하는 시간도 가졌는데.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포함해 국내에서는 여러 번 상영했는데 아직 해외 상영이 없던 차였다. 칸에 초청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러려고 월드 프리미어가 잘 안 풀렸구나’ 싶었다. 상영회 당시엔 너무 긴장해서 기억이 없다. (웃음) 나중에 스태프들이 찍어준 영상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실감이 났고 그제야 기뻤다.
- <메아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작품인가.= 어느 날 꿈을 꿨다. 10대 때부터 꿈 일기를 써와서 꿈을 자세하게 꾸는 편인데 그날은 한 소녀가 주인공이었다. 마을 밖으로 벗어나질 못하다 금지된 숲으로 도망갔는데, 그 숲을 보호하는 존재의 도움을 받은 소녀가 마침내 마을을 탈출해 자기 삶을 찾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실제로 꿈에서 거대한 숲 밖으로 소녀가 걸어 나올 때 엄청나게 고양됐고 그 기분이 꿈에서 깬 뒤에도 이어졌다. 이 장면을 나만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영화화를 결심했다.
- 꿈에서 본 것과 비슷한 분위기의 숲을 섭외하는 게 주요했겠다.
= 그렇다. 강원도 원주에서 좀더 들어가면 있는 보호숲이 내가 원하는 이미지의 장소였다. 촬영 허가가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드라마 촬영을 많이 하는 곳이라 섭외가 잘됐다.
- 옥연이 도깨비를 만나는 사당 또한 중요한 장소인데.= 숲을 관리하는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 숲속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 사당을 열면 제사상이 나오는데 우리는 그 문을 닫은 채 구조물만 활용했다.
- 도깨비나 금줄에 얽힌 설화 같은 건 추후에 추가한 건가.
= 그렇다. 혼례복과 한복을 입은 인물들은 꿈을 꿀 때부터 등장했었고 금줄은 살을 붙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처럼 이야기를 쓰고 싶어 그런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다. 미술감독님에게도 500년 전 한 고립된 마을을 상상하며 준비해 달라고 했다. 도깨비 ‘메아리’에 관해선 그가 처음에 어떻게 숲으로 가게 됐을까를 상상해봤다. 혼자 메아리에 대한 설화를 써봤는데 천년 전엔 사람이었고, 여러 사건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는 내용이다. 신발에 대한 설정도 좀더 디테일하게 써뒀는데 단편의 포맷 안에서 이 이야기를 전부 다룰 순 없겠더라. 그래서 큰 줄기만 남기고 많이 정리했다.
- 옥연을 따라 들어온 남자들이 여자 혼령들의 강강술래에 휩싸인다. 그 장면을 보고서야 그간 숲으로 도망쳐온 사람들이 대부분 옥연과 같은 여자들이었겠구나 싶었다.
= 그 시기의 여성들은 외부와의 접촉이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특정 상황에서 도망쳐야 하거나, 도망을 제대로 칠 수 없어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선택을 내리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들일 것 같았다. 숲이 금지된 공간이기 때문에 반대로 누군가에겐 보호의 장소가 될 수 있겠다고 여겼고 그래서 메아리의 숲을 약자를 보호하는 공간으로 묘사했다.
- 배우들 캐스팅은 어떻게 진행됐나.= 방울 언니 역할의 김평화 배우는 학교 선배다. 학교 공연 때 봤는데, 공연 보면서 그렇게 운 건 처음이었다. (웃음) 에너지가 폭발적인 사람인데 또 가진 분위기는 묘한 배우다. 그래서 SNS를 팔로해놓고 언젠가 같이 작업하자고 해야지 싶었다. 그렇게 1년 후에 <메아리> 시나리오를 들고 갔다. 팬심을 숨기려 했는데 잘 안되더라. 시나리오가 마음에 든다며 바로 수락해서 함께하게 됐다. 옥연 역의 정은선 배우는 필름 메이커스를 통해 만났다. 350개의 지원 메일을 받았고 5명의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그중 옥연을 악에 받친 게 아니라 지치고 포기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에너지를 지닌 인물로 해석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연출부 5명 중 2명이 정은선 배우의 영상을 보고 울었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둘 다 차기작이 있어서 칸영화제에는 함께 못 왔지만, “나 또 (칸에) 올 거니까 그때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다.
- CJ문화재단에서 하는 스토리업 단편 제작 지원을 받아 완성했다.
= 제작 지원을 받기 위해 따로 피칭 TF팀을 꾸릴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다. (웃음) 임선애 감독님이 멘토셨고 시나리오 피드백부터 콘티 검수, 편집, DCP까지 단계별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현업에 계신 분들을 만나 작업 방식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본인만의 작업 방식도 정리가 된 것 같나.= 이제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선배들에게 전해 들은 방식을 직접 실천해보니 생각과 다르게 진행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시간이 부족해 잠을 줄여가며 작업했지만 스트레스 해소와 체력 관리를 위해 매일 자전거 1시간씩은 꼭 탔다. 동료들과 영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한 경험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영화를 하게 만드는 저력이 여기 있는 듯하다.
- 영화감독이라는 꿈은 언제 갖게 됐나.= 원래는 오랫동안 미술 입시를 준비했었다. 학원 선생님들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출신이었는데 그분들의 새로운 시각이 정말 좋았다. 그래서 나도 선생님들이 공부한 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한예종 조형예술과 입시는 잘 안됐고, 경로를 틀어 다른 과를 살펴봤는데 영화과 입시 유형이 재밌더라. 그렇게 4개월 정도 준비해서 합격했다. 가서 공부해보니 적성에 잘 맞았다. 하나의 캔버스에 한정됨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 장르나 주제 면에서의 관심사도 궁금하다.= 주제는 잘 모르겠지만 장르는 앞으로도 계속 판타지를 찍고 싶다. 동화책을 정말 좋아하는데, 동화는 결국 다른 세계를 경유해 교훈 혹은 재미를 전달하는 것이지 않나. 나는 동화의 그 지점이 마음에 든다. 그 맥락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도 좋아하고. 시의성 있는 영화도 중요하지만 내가 잘 연출할 수 있는 작품의 결은 아닌 것 같다. 앞으로도 판타지 장르의 범위 안에서 다양하게 시도해보려 한다.
- 준비 중인 차기작도 있나.= <메아리> 장편화를 정말 하고 싶다. 장편화를 한다면 옥연과 방울의 서사, 그리고 메아리의 탄생과 옥연의 시대가 병치되면서 메아리의 비밀이 풀려가는 구도를 담게 될 것 같다. 강강술래 장면도 규모를 키워 더 잘 찍어보고 싶고. 다른 작품으로는 사람들이 갑자기 증발하고 소수의 몇몇만 남았는데, 이들이 ‘에덴’이라는 미지의 공간으로 다 같이 로드 트립을 떠나는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기회가 된다면 동시대의 사랑 이야기도 하나 쓰고 싶다. 사랑의 형태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단순히 연인간의 사랑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로선 막연히 구상 중인데 칸영화제에 오니 다들 다음 작품에 관해 질문 주시더라. <메아리>를 시작한 게 벌써 2년 전이니 쉰 지 오래되기는 했다. 기세 좋을 때 잘 이어나가보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