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내 별명은 “지상 최고의 모범생”이었다. 무슨 그런 별명이 있나 싶겠지만 사실이다. 당시 국어선생님이었던 굼벵이는(죄송하지만 별명이 굼벵이셨다. 본명은 기억이…) 수업시간마다 나를 가리키며 “음, 다들 지상 최고의 모범생을 보고 배워라”라고 말씀하셨다. 친구들은 그때마다 킥킥댔는데, 그건 내가 국어책 밑에 무협지나 판타지를 끼워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눈치채지 못했다. 내 카무플라주가 절묘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나는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그러니까 소설책을 읽으며 수업을 들었다. 이게 바로 멀티태스킹?
습관이 된 탓인지 그 후로도 수업시간에 수업만 들으면 좀이 쑤셨다. 뿐만 아니라 뭐든 한번에 하나만 하면 지루해 견딜 수 없었다. 산책할 때 음악을 듣거나 핸드폰을 하는 것처럼, 나는 산책을 하며 책을 읽었고 밥을 먹으며 책을 읽었고 헬스장에서 책을 읽었고 운전을 하며 책을 읽었다. 신호에 걸린 지돈의 차를 봤는데 책을 읽고 있어서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는 직장 동료의 일화는 교통안전 캠페인의 전설처럼 전해진다(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으니 오해하지 마시길).
사전적 의미에서 멀티태스킹은 동시에 여러 개의 일을 하는 것이다. 1965년 IBM 시스템/360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에서 유래된 용어로 이후 인간에게도 적용됐다. 과연 사람도 컴퓨터처럼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을까?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최근의 실험 결과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하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 대부분은 이미 멀티다. 라면을 끓이며 통화를 하고, 야구 중계를 보며 육아를 하고, 출퇴근을 하며 영단어를 외우고, 화장실에서 SNS를 하고. 한번에 하나만 해서는 이 험난한 세상을 살 수가 없다.
병렬독서도 있다. 한권의 책을 다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지 않고 여러 권을 동시에 읽기. 병렬독서의 부작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사실 굳이 병렬독서를 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독서가 병렬독서다! 완독을 한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친구는 말이 좋아 병렬독서지 이건 그냥 교통체증 같은 거라고 했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교통체증이 아니라 교통사고다. 명절 연휴의 100중 추돌사고….
망할 OTT 때문에 영상물도 책과 마찬가지가 됐다. 보다 만 작품이 대체 몇개인지, 빨리감기로 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다 볼 방법은 마지막 화의 10분만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걸 봤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차피 봐도 1년만 지나면 까먹는데, 본 거라고 해도 되지 않나? 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멀티태스킹은 죄악이다. 한때 유능한 사람의 필수 스킬로 홍보됐던 멀티태스킹은 이제 뇌 건강의 적그리스도가 됐다. 모든 뇌과학서와 자기 계발서가 비효율의 근원이자 치매의 원인으로 멀티태스킹을 지목한다.
멀티태스킹은 효율을 위해 찬양받았지만 효율을 위해 버림받았다. 솔직히, 멀티태스킹이 무슨 죄인지…. 우리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멀티태스커였는데, 그걸 더 강화하려고 했던 건 우리 자신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컴퓨터에게, 스마트폰에게 매일같이 멀멀티티태스킹을 시킨다. 대부분의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멀티태스킹을 부여하듯. “그게… 안되니?” (상사 왈) 흥미로운 건 멀티태스킹을 상찬하거나 비판하는 담론 모두 동일한 욕망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더 높은 효율, 더 높은 집중력, 더 나은 삶, 성공.
집중력은 현대사회의 신흥종교다. <도둑맞은 집중력>에 따르면 집중력을 되찾으면 내 삶을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불평등을 극복하고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조너선 크레리 같은 저자가 보기에 주의집중은 단지 디지털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사회가 만들어낸 특정 체제다. 규율과 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주의집중과 주의산만의 메커니즘이 가치로 탈바꿈해 내면화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그냥 산만하게 멀티 돌리며 멍한 상태로 이것저것 하면 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가 집중력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에 집중해야 할것인지, 어떻게 산만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기업이 흔드는 당근을 쫓는 말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업에는 대형 테크 기업뿐 아니라 출판사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SNS는 나쁘고 종이책은 옳다고 말하지만 과연?)
‘구름과 멀티태스킹하기’는 러시아 철학자 스베틀라나 보임의 “구름들과 멀티태스킹하기” (Multitasking with Clouds)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보임은 처음부터 효율에는 관심 없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건 성공이 아니라 오류다. 기술이 야기하는 예측 불가능하고 반복 불가능하며 독특하게 비완결적인 오류들. 그녀는 이를 브로큰 테크놀로지라고 불렀다. 구름들과 멀티태스킹하기는 오류를 경유하는 삶의 기술이며 망가진 기술이 불러온 우연한 경로이자 겹침이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여전히 멀티태스킹 광이다. 나는 OTT를 전체 화면으로 보지 않는다. 창을 여러 개 띄우고 책상에는 책을 펼치고 오른손으로 스마트폰을 하며 영화를 본다. 그렇게 본 영화가 기억에 남냐고? 물론!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에 남아야 하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킬링타임이라고도 하지 않나?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고, 어쩌면 뇌에 구멍이 송송 뚫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가끔 뭔가 남는다. 섬광처럼, 잔상처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억되지 않지만 책과 스마트폰과 노트북 사이를 오가는 가상의 선이 아주 이상한 곳으로 이어지는 감각 이, 한밤의 꿈처럼 존재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구름을 표면이 존재하지 않는 물체라고 말했다. 표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경계가 존재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름은 모든 사물을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인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으니 형태의 변화도 자유롭다. 하지만 그만큼 가볍고 가변적이고 쉽게 흩어진다.
스베틀라나 보임은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구름들과 멀티태스킹하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철도가 처음 발명됐을 때 창밖을 스크린처럼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제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버려진 산업단지가 있고 옆좌석 사람의 노트북에는 살해된 사내 와 그 위를 흘러가는 구름을 촬영한 영화의 장면이 재생됐다. 뒷좌석의 대화가 보임의 귀에 들렸다.
“아빠, 달이 움직이는 거예요?”
“아니, 달은 엄청 멀리 있어.” 아빠가 설명했다. “움직이는 건 우리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질문했다.
“꼬마야, 넌 이름이 뭐니?”
“기억이 안 나요.” 소년이 대답했다(Multitasking with Clouds–Svetlana Boym(harvard.edu)).
구름과 멀티태스킹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잡을 수 없는 것을 기억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실천하기? 구름과 멀티태스킹 하기 위해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말고, 어떤 목표도 갖지 말고, 어떤 효용도 바라지 않고 세계를 받아들이기. 세계는 당신을 낯선 곳으로 이끌 수도 있고 그저 멍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낯선 곳은 세상이 감탄하는 신대륙일 수도 있고 쓰레기장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런 모험을 시도할 시간이 있을까? 우리에게 그런 자유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