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기 타는 동안, 기사의 마음도 탔겠지?2001년 10월1일, 부산 동래별장│43차 촬영
추석 연휴 기간 내내 스탭들은 부산에 붙들려 있다. 동래별장이라는 이 멋진 일식풍의 고가(古家)는 박정희의 별장이었다가 뒤에 요정을 거쳐 지금은 큰 일식 요리집으로 바뀐 곳이다. 그런 사연인지라 빌리는 과정도 어려웠고 겨우 빌린 게 영업을 하지 않는 연휴 즉 추석 전후 3일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빌려야 했다. 이런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일상적인 가옥보다 훨씬 특별한 곳- 영화 속에서 SI의 안전가옥 같은 곳으로 쓰이기 딱 알맞다. 이 장소에서 석과 희수의 유일한 멜로도 만들어진다. 어제 무척 많은 수의 컷들을 소화했지만 오늘 내일 사이 낮-밤-낮에 걸쳐 40여컷을 찍어내야 한다. 더구나 어젠 발전차가 불이 나는 사고로 국내 하나뿐인 새 조명기 루비세븐과 아우라 소프트가 타버렸다. 드러내진 않지만 염기사 속도 그렇게 까맣게 탔을 것이다. 오늘은 그런 대로 순조롭게 진행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신인 석과 희수와의 인간적인 교감이 오가는 대사와 껴안는 장면을 남겨놓고 날이 밝으려 한다. 김윤진이 다소 초조해한다. 꼭 다른 것 찍다가 정작 중요한 장면은 서두르게 된다고…. 희수가 석과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석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린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첫 테이크. 희수가 아예 펑펑 울어버린다. 감정이 과했다. 다시 한번. 윤진의 눈물 때문에 어색해진 승우. 다시 한번…. 이번엔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절제된 눈물을 흘리는 희수. 석도 눈가가 빨개진다. 됐다. 두 사람의 눈물 때문에 다소 상기된 내가 뛰어나가며 OK를 외친다. 스탭들 사이에서 박수가 나온다.여름 다 보내고 겨울에 물 속에 뛰어들라고?10월13일 50회 촬영 춘천 가일리│50차 촬영
내가 아는 한 북한강에서 유일하게 밤마다 물안개가 그림처럼 피어오르고 주변에 횟집, 낚시터 하나 없는 곳은 여기뿐일 것이다. 이곳이 로케이션 촬영지로 적절치 않은 건 불편한 이동로뿐이다. 깎아지른 계곡이 병풍처럼 펼쳐져 자못 인적이 닿지 않는 과거 비무장지대처럼 보이는 곳도 실제 비무장지대를 제외하고는 여기뿐일 것이다. 세트팀은 이곳에 자재수송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바지선을 이용해 보드워크를 지었다. 그리고 보드워크에서 보이는 이장님댁 앞부분을 영화상 신부의 은신처 오두막으로 꾸몄다. 촬영 3일째. 어제부터 촬영에 합류한 최민수는 교통이 불편한데 이 정도의 그림이라면 서울 주변 어디 가도 있다고 투덜거렸다. 어제 그는 더운 여름 다 보내고 가을이 되어서야 자기를 추운 물 속에 집어넣는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담요를 뒤집어쓰고는 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그렇게 열을 낼 때는 크게 다른 연출의도가 없다면 그냥 두는 게 낫다. 제 풀에 신이 나서 더 많은 컷을 스스로 연출하긴 하지만 촬영 전에 연출자인 나와 의논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는다.지출이 초과되더라도 제대로 가자2001년 10월27일, 제비표페인트 두바이 호텔│59차 촬영
며칠째 총을 쏴대고 있다. 오늘의 포커스는 자동차 폭파 컷. 폭도들 때문에 고립된 매이(김선아) 일행은 호텔로 진입하려다 문 폭파로 좌절된 조 일행을 구하러 가야 한다. 그 순간 바주카포가 보이고 매이 일행은 죽어라 뛴다. 그 뒤로 발사되는 바주카포. 자동차를 폭파시킨다. 구사일생 다른 건물로 뛰어들어와 총탄을 피하는 매이 일행. 이 장면의 중심 인물은 매이다. 김선아는 며칠 전 바로 이 과정에 이르는 전투장면을 찍다가 자동차 파편이 튀어 왼쪽 뺨과 엉덩이에 부상을 입었다. 요즈음 두바이 총격 신 때문에 말이 많다. 촬영 기간이 늦어지는 데 대해 배우들이 이제 투덜대기 시작했고 시간과 돈이 예상보다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지출이 초과되더라도 폭파 같은 효과를 더 넣자고 생각해낸 건 정작 안 대표다. 그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베팅으로 보인다. 단지 그 베팅이 좀 늦은 관계로 준비 기간이 짧아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욱이 이럴수록 안전을 외면하면 안 된다. 안 대표는 잔뜩 기대하고 지금 현장에 와 있다.몇번 연습을 해본다. A카메라는 랜지로버 짐칸에 타고 매이 일행이 뛰는 것을 정면에서 같은 속도로 이동하며 잡는다. 그들의 뒤로 화염이 솟아오른다. B카메라로는 측면에서 일행이 빠져나가고 폭파되는 차를 잡는다. C카메라는 거의 정면 부감으로 올라가 정면 불길을 조금 피한 자리에서 잡는다. 문제는 이동숏인 A캠이다. 인물 위주의 가장 다이내믹한 순간을 잡아내야 하기 때문에 인물과 폭파거리, 렌즈 사이즈와 앵글, 인물 이동 속도와 운전 속도와 롤링 정도, 폭파 타이밍과 렌즈 거리, 포커스, 폭파를 전후한 인물들의 액션, 리액션. 모두 약속대로 NG없이 성공해야 하는 작업이다. 카메라가 돌고 배우들이 뛴다. 언제 무거운 엉덩이 때문에 훈련 때마다 핀잔을 들었다더냐! 김선아 총을 쏴대며 진짜 살려고 뛴다. 펑! 붉은 불꽃이 모니터에서도 선명하게 인물들의 뒷배경을 감싸며 치솟는다. 인물들은 약속대로 폭파후풍에 휩싸이듯 몸을 비틀고 주변에 총을 쏴대며 오른쪽으로 프레임 아웃되어준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차는 여전히 높은 불길로 타고 있다. 가슴이 후련해진다. 흥분된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해 등 뒤에서 열기가 느껴지던 순간을 스탭들에 설명하며 수다를 떨어대는 김선아.
그래, 결국은 끝이 나는구나2002년 2월22일, 여수 선박수리공장에서 루카스호 연구실│109차 촬영
여수 촬영 마지막날이자 이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이자 실질적으로 9개월간의 촬영이 끝나는 날. 아직 3회 분량가량 보충, 인서트 촬영이 남았지만 오늘은 상징적인 날이다. 그래. 결국 끝은 나는구나. 오늘은 낮, 밤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는 긴 하루가 될 것이다. 우리의 세트가 되어주는 이 배는 30년간 오사카에서 대만을 운행하던 호화 여객선이었다. 지금은 팔려나갈 날을 기다리며 묶여 있는데 덕분에 배가 약간 기울어져 있다. 골리앗과 석의 마지막 대결, 과거의 망령과 탈출, 희수의 기억 같은 환상적인 장면도 찍었다. 물론 내부에 인테리어를 이용한 세트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점심을 먹고 갑판에 나와 앉아 있으려니까 오늘은 그런 것까지 기분좋게 느껴진다. 바람이 제법 봄냄새를 풍긴다. 그래. 여기는 반도의 남쪽 끝 여수! 이 땅에서 가장 먼저 봄의 기척을 느낀 파수꾼처럼 그 시간을 즐긴다.
PS.그때 감상은 건방진 낙관이었다. 그날 밤 배 갑판 위에서 위험한 촬영을 진행하느라 긴장한 채 밤을 지새며 우리는 얼어죽다 살았다. 현실은 언제나 그랬다. 모든 촬영이 끝난 건 3월7일 112회째. 결국 3월8일 아침이 되어서였다.글 정윤수(<예스터데이> 감독) / 디자인 임정숙 norii@hani.co.kr▶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1)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2)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