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이 끝나고 2주가 지나도록 내가 살던 이 집이 낯선 것은 다 냉장고 때문이다. 냉장고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3개월간 방치한, 한달가량 열어본 적도 없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기란 외장하드 속 촬영 소스를 확인하는 기분이랄까. 냉장고 안에 내가 뭘 넣어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무서운 마음에 냉장고 문을 열 수가 없었고 생수병이며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이며 식탁과 싱크대에 쌓여만 갔다. 더이상은 이 시한폭탄 같은 냉장고를 끌어안고 살 수는 없었다. 날을 잡고 냉장고 청소를 했다. 5리터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몇번이나 내다버리고 재활용 쓰레기봉투는 큰 봉지로 두개나 나왔다. 하루 종일 냉장고 속을 닦고 또 닦았다. 하얗게 빛나며 찬기를 내뿜는 텅 빈 냉장고 속을 보고 있자니 이번엔 이것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가 막막했다. 내가 뭘 먹고 살았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일단은 바나나 한 송이와 요구르트 한 묶음을 사다 넣어놨는데 그 사이 또 그대로 검게 시들고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일자목에서는 자글자글 모래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휘어진 등허리는 단 10분의 옆구리운동으로 이틀 동안 근육통 때문에 펴지질 않는다. 이렇게 기울어진 몸으로 살 수는 없다고. 몸도 바로 세우고 생활도 바로 세우자.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인바디를 해보았는데 온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최근 몇년 동안 시간이 되는 날은 무조건 하루 두 시간에서 두 시간 반 따릉이를 타왔는데 특히나 다리에 근육이 하나도 없다니. 따릉이를 탔던 그 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나!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따릉이가 체질에 맞지 않았나봐. 필라테스를 열심히 해보자. 그런데 온몸이 왜 이렇게 달달 떨려. 휴대폰 진동 울리듯 바들바들 떨리는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호흡. 호흡을 신경 쓰자. 들숨에 갈비뼈 펼치고 날숨에 갈비뼈 쪼이고. 훕훕.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라테스 선생님. “어머 회원님. 입술이 참 얇으세요. 우리 엄마 입술 같아요.” 네? 엄마 입술이요? 아니 선생님 얇은 입술이 내 콤플렉스면 어쩌시려고! 진짜 콤플렉스면 어쩌시려고! 입술을 말아 숨겼다. 필라테스도 체질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현관문을 열자 우리 집 고양이 주안이가 집 밖으로 나가려고 머리를 들이민다. 예전에는 안 그랬었는데…. 촬영 때문에 몇주간 집을 비운 이후부터 주안이는 계속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내가 가 있던 그곳이 그토록 궁금한가보다. 부쩍 고양이들의 분리불안이 심해졌다. 내가 방만 이동해도 따라나서며 바지 밑단을 물어 당기고 하루 종일 내 옆을 빙글빙글 돌며 하울링을 한다. 고양이들의 분리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나의 생활을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리려면 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고양이들도 빙글빙글, 나도 빙글빙글.
잠은 얼마나 또 계속 오는지. 집에서 계속 자고, 잠만 자고. 편집실에서도 또 졸고. 내가 하도 조니까 편집기사님이 20분의 낮잠 타임도 주신다. 그런데 나는 휴일에 자느라 또 숙제를 안 해가고. 계속 잠만 자고. 이상하게 계속 잠만 자고. 그런데 계속 깨고. 30분마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그러면 하루 만에 여러 날이 흐른 기분이다. 예전의 일상은 또 그만큼 아득하게 느껴진다. 내가 어떻게 살았었는지가 아득해서 일상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가 막막한 것이다. 내가 뭘 먹고 살았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에세이를 쓰는 것도 다 까먹어버렸다.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서 지난 1년간 써왔던 칼럼을 첫화부터 직전 화까지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다른 것보다는 우선 일단 써야만 한다고.
지난 1년 동안 칼럼을 연재하며 일상에 놓인 문득 떠오르는 단상들과 벌어지는 일들을 가만히 손안에 쥐고 그것들이 과연 글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계속해서 식별하며 사는 생활을 했다. 쓰는 사람으로서의 감식안을 이렇게까지 발휘하며 지냈던 시기가 있었던가. 연재라는 것이 머리 한켠에 언제나 번뜩 눈을 뜨고 있어 마냥 넋 놓고 살 수는 없었다. 그 약간의 긴장감이 일상의 좋은 활력이 되었다. 좀더 차분히 써내려갔더라면 좋았겠지만 세상일에 어디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들이 있으랴. 이 칼럼 연재가 있었기에 지난 1년 동안 덜 지루하고 덜 외로웠다.
가끔 동료 감독님들에게 ‘김세인의 데구루루’(이하 ‘데구루루’)를 읽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럼 나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서둘러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거나 심지어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도 했다. 참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사실은 반가웠다. 독자가 필요 없는 글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묻고 싶었다. 당신의 쓰는 생활은 어떤가요? 평소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친구가 다른 친구를 통해 ‘데구루루’를 잘 읽고 있다고 전해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는 머릿속 책상에 친구를 앉혔다. 묵묵한 뒷모습으로 타자를 치는 친구. 글에 대해 생각하며 혼자 밥을 먹고 걷고 읽는 친구. 오랫동안 혼자이면서 함께한 기분이 든다. 그 친구도 ‘데구루루’를 읽으며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글을 쓰는 것은 오롯이 혼자 직시해야만 하는 것이기에 어떨 때는 그것이 오히려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순간은 무섭고 외롭다. 우스꽝스럽게 보일지언정 그 두려움, 외로움, 허세, 자아도취 모두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외로운 사람들의 친밀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이 칼럼이 그 목적에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지난해 봄 칼럼 연재를 제안해준 <씨네21>과 1년간의 연재 동안 매번 지각하는 나를 타박하지 않고 다독여준 조현나 기자님, 칼럼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 항상 첫 번째 독자가 되어준 J에게 특별히 감사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글 쓸 때 혼자가 아니었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