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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열풍 탄 TV 광고 속 남성·여성상
2002-06-12

월드컵 男과 女

삼성카드-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삼성카드 대행사 및 제작사 제일기획

딴소리를 내뱉기가 멋쩍은 시기다. 일제히 ‘오 필승 코리아’, ‘히딩크, 짱’ 등을 외치며 16강 진출을 희망하고 있는 이때에 월드컵과 무관한 광고를 얘기한다면 곁다리 긁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현재 국내 광고계는 너나 할 것 없이 월드컵을 벗삼아 맹렬히 뛰고 있다. 이른바 FIFA 월드컵 공식파트너인 기업을 비롯 유수의 업체들이 한국전 중계방송의 전후 광고시간대를 배정받기 위해 치열한 장외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15초 광고 한번에 일반 프라임타임대의 광고비보다 3배나 많은 3천여만원의 엄청난 광고비를 기꺼이 지불하고 있다.

'월드컵 심(心)'을 겨냥한 광고들은 주제의 한계 때문인지 얼핏 키재기하는 도토리마냥 고만고만해 보인다. 그럼에도 남다른 반응을 자아내는 데 성공한 튀는 사례가 몇몇 있다.

먼저 히딩크 감독의 컴백으로 화제를 낳은 삼성카드 CF를 빼놓을 수 없다. 삼성카드 광고는 지난해 히딩크를 내세워 ‘Just one’이란 슬로건을 알렸다가 히딩크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서 기대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린 바 있다. 그 이후 삼성카드와 히딩크의 연결고리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16강 진출의 꿈이 현실로 무르익으면서 히딩크의 주가가 치솟았고, 이때를 놓칠세라 삼성카드 광고는 순발력 있게 히딩크 감독을 떠올렸다. 히딩크와 체결한 모델 계약기간이 불과 1개월밖에 남지 않는 상태였다.

이번 광고는 <마이 웨이>란 배경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주먹을 힘차게 올리는 골 세리머니 장면 등 경기장에서 만날 수 있는 히딩크의 모습을 다큐형식으로 담고 있다.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허구보다 더 극적인 효과를 살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의 특성을 잘 활용해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삼성카드를 상징하는 블루박스로 환희에 찬 히딩크의 얼굴을 포착한 뒤 ‘히딩크,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란 나직한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마지막 대목은 인상적이다. 뭉클한 감동과 더불어 광고의 말대로 정말이지 히딩크가 능력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절로 인다. 그런데 국민의 열망을 대변하는 ‘구세주’로 화려하게 격상돼 광고에 돌아온 히딩크 감독의 모습은 세상의 인심이란 게 참 변덕스럽다는 쌉쌀한 뒷맛도 준다. 삼성카드 광고는 정우성-고소영 커플을 내세운 ‘능력있는 남자’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히딩크를 주연으로 재기용해 월드컵 시류를 절묘하게 활용했고, 절제있는 표현기법으로 소비자의 마음과 귀를 매혹하고 있다.

SK텔레콤의 스피드 011 ‘붉은 악마’ 캠페인은 월드컵 관련 광고의 보편적인 형태인 응원형 가운데서도 군계일학이라 할 만하다. 이 CF는 전속모델인 한석규를 응원단장으로 내세워 응원방식을 알려주며 SK텔레콤이 붉은 악마를 후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박수 다섯번)’, ‘오 필승 코리아’ 등이 국민적인 목소리와 몸짓으로 퍼져나간 데에는 이 광고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후원자의 겸허한 자세로 무료 응원교육을 실시한 듯 보이지만 한편으론 붉은 악마의 구단주 같은 위풍당당함을 풍기면서 기업의 위상을 높이는 데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렇다면 남성의 축제인 월드컵에서 여성은 어떤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 KT, KTF, BC카드 등의 CF를 보면 월드컵과 여성의 관계를 대략 가늠할 수 있다.

KTF 상금프로모션 광고와 BC카드 광고는 귀엽고 깜찍한 여성스타의 응원을 선보인다. KTF CF는 ‘황선홍 아저씨 한골’, ‘안정환 오빠 한골만 더’ 등을 외치며 뽀뽀세례를 퍼붓는 장나라를, BC카드 CF는 월드컵 경기 관중석에서 ‘부자되세요’의 말투로 ‘잘하세요. 꼭이요. 제가 맛있을 거 사드릴게요’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김정은를 내세우고 있다. 히딩크 감독과 한석규가 각각 국민염원의 실천자, 국민통합의 주도자로 나서고 있는 것과 달리 이들 여성스타는 살가운 서포터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KT-제작연도 2002년 광고주 KT 대행사 휘닉스커뮤니케이션 제작사 까치 앤 까치(감독 김영배)

그런가 하면 KT 광고는 르네상스 시대의 천장화처럼 축구선수들의 경기장면이 하늘을 수놓고 있는 어느 광활한 벌판에 여신 같은 차림의 이영애가 신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난이도의 합성기술을 동원해 빚어낸 환상적인 분위기의 영상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여성성의 한축에 애교가 있다면 다른 축엔 모성이 있다는 듯 이영애가 아늑하고 성숙한 이미지로 월드컵의 수호천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한켠에선 프랑스의 지단 같은 세계적인 축구스타가 속속 글로벌브랜드 CF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유머와 재치로 무장된 광고에서 철저히 엔터테이너로서 스타성을 발휘하고 있는 게 특징. 반면 여러 광고 속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땀으로 범벅된 비장한 표정으로 국민적 열망이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안방극장을 뒤덮고 있는 월드컵 광고엔 이렇게 기업의 갖가지 욕망, 여성과 남성의 비교되는 역할론, 외국과는 다른 우리네의 특수한 상황 등 다채로운 풍경이 들어 있다. 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