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선배 감독님과 동료 감독님을 만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아이스크림 와플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연애 이야기에서 영화 이야기 그리고 괴상한 경험담까지 달고 쓴맛이 절묘하게 섞인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요즘 고민이 하나 있어 꺼내놓았다. 답이 없거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고민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요즘 A이야기를 구상하며 살을 붙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B시나리오를 먼저 써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어떤 감독, 작가들은 대여섯개의 이야기를 동시에 쓰기도 한다는데 나는 영 그런 타입이 되지 못한다. 멀티는커녕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버벅거리기 일쑤다. 그래서 B를 쓰다가 A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달아나버리는 건 불 보듯 뻔하고 이런 고민을 하는 시점부터 이미 A이야기는 나에게서 슬쩍 뒷걸음질을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는 없다. 애초에 B작업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B작업을 우선적으로 마쳐야 한다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답이고 A작업이 흐릿해지는 것에 대한 답은 없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선배 감독님이 툭 말씀하셨다.
근데 그 두개가 다른 게 아닐 수도 있어.
순간 모든 것이 단순하고 명확해졌다. 그 말인즉 한 사람이 선택하고 끌리는 이야기들은 그사이 분명 이어지는 연결점이 있다는 말이었다. (사실 그때 약간은 취해 있어서 잘못 알아들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명쾌했다. 그럼 됐지.) B시나리오를 쓴다고 해서 A시나리오의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A와 B 사이 상호작용이 이루어져 B의 자극으로 A가 변형되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거나 급기야 B와 A가 세포 융합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상황과 상황이 유기적으로 얽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와 이야기도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이야기와 생활도 유기적으로, 이야기와 사람도 유기적으로, 사람과 사람도 유기적으로…. 뭐 하나 버려지고 무의미한 것이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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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오키나와에 갔었다. 오키나와에서 A시나리오는 무섭도록 돌변했다. 오키나와 숙소에서 어지럽게 떠올랐던 잡생각들과 인터넷 알고리즘에 의해 건져진 아이디어들이 여러 방향으로 뜨문뜨문 흩어져 정리되지 않았다.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할지 혼란한 상태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신기하게 서울로 돌아오자 우주의 별과 별 사이처럼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흩어진 요소들 사이 흐릿한 실선 하나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 요소들은 하루는 더 멀게 하루는 더 가까이, 마치 들숨과 날숨에 피가 도는 것처럼 흩어졌다 모였다 흩어졌다 모였다 위치를 재정립하더니 어느 순간 견고한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로는 상관이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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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숙소에 도착해 발코니를 보자 하늘이 막 주황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을과 함께 바다 수영을 하자. 그리고 글쓰기에만 집중하자. 배낭을 구석에 던져놓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을 향해 걸었다. 어느새 막 주황빛으로 변하던 하늘이 완연한 붉은빛이 되었고 이러다 해가 다 져버리겠다 싶어 뛰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해는 기울어져 가는데 시골길을 뛰고 뛰어도 해변은 보이지 않았다. 겨우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운동화만 벗어던지고 바다에 덤벼들었는데 해는 이미 들어가버렸고 물은 너무나도 미지근했다. 이럴 거면 바다에 들어가지 말걸 후회가 들려던 찰나 옆의 대형 튜브 미끄럼틀쪽에서 비명을 지르듯 웃는 청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위가 고요한 보랏빛으로 젖어들어 청년들의 얼굴은 암흑으로 읽을 수 없었다. 그림자 같은 청년들은 서로 한데 뒤엉켜 물속으로 점프하고 헤엄치며 어둠 속에서 숨겨지지 않는 젊음을 마구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미지근한 물에 누워 그들의 찬란한 한때를 엿보았다. 어느 순간 웃음소리는 잦아들고 청년들은 아주 느리게 어기적거리며 뭍으로 걸어갔다. 짐을 챙기는 손끝과 발끝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해변을 벗어나며 그들은 계속 뒤를 돌아봤다. 이 검은 바다에 그들이 두고 간 건 뭐지 생각하다가 퍼뜩 아 이 검은 바다에 나 혼자뿐이구나 깨닫고 나도 어기적 뭍으로 걸어나갔다. 이미 해가 져버린 해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달콤하고 짭조름한 아쉬움이었다. 숙소로 걷는 길에 방금 내가 목격한 것이 B시나리오의 정서와 아주 밀접하게 닿아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A시나리오에만 집중하기 위해 떠났던 오키나와행에서 종종 B시나리오의 조각들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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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임에서 지인이 직장 관련하여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그 고민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A시나리오의 주된 갈등의 메커니즘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임의 또 다른 지인이 바로 며칠 전 그 고민과 내용이 완전히 겹쳐지는 연극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고 모임의 지인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한 사람의 현재의 고민에 대한 해결점이 다른 한 사람의 일상에서 사건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 너무 소름 끼치도록 신비로웠다. 이런 내 반응이 호들갑으로 여겨지고 심드렁하게 그게 뭐 싶을 수도 있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분리되고 쪼개질 수 없이 아주 천천히 흐릿하게 순환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고 신기하다. 내가 지금까지 나열한 에피소드들도 각개의 상황들로 보여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나에게 묻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보면 결국은 아주 흐릿한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상황과 상황이 유기적으로 얽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와 이야기도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이야기와 생활도 유기적으로, 이야기와 사람도 유기적으로, 사람과 사람도 유기적으로…. 뭐 하나 버려지고 무의미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