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연극원 연기실습실을 찾아가다
2002-06-07

“카메라 렌즈는 가장 예민한 관객”

“우우우우.” 10여명의 배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무대를 횡단한다. 오순택씨를 인터뷰하기 앞서 찾아간 연극원 연기실습실 마루엔 아직 오전 11시도 안 됐는데 땀이 배어 있다. “어째서, 누구를 위해서 그 애를 희생시켰지…. 하데스가 그 자들 애의 살보다 내 애의 살을 더 먹고 싶어했단 말이냐?” 무대 중앙에 선 여배우의 목소리가 관객 하나 없는 실습실 공간에 쩌렁쩌렁 울려퍼지자, 오순택씨와 그의 대학원 제자들이 오전 10시부터 3시간 동안 연습하는 작품이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 <엘렉트라>임이 드러난다.

연극원장 김광림씨의 권유로 강의를 맡은 오순택씨는 <엘렉트라> 공연을 준비하느냐는 질문에 수업의 과정일 뿐이라며 그리스 비극을 연습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연기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죠. 우리 학생들 경우엔 대체로 사실적인 연기, 실제적인 삶을 모방하는 연기에 집중하는 편인데 연기의 깊이를 쌓아가는 데는 이런 작품이 도움이 됩니다. 실생활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동작, 격정적인 대사, 현재와 비교해보면 판타지에 가까운 연기지만 이런 작업이 연기패턴의 기초를 만들어줍니다.” 연기실습은 교수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다. 실습실에선 잠시도 학생들의 동작이 쉬지 않는다. 대사 하나를 할 때마다 동작 하나가 더해질 때마다 오순택씨는 자세와 발성과 감정에 대해 지적하며 같은 장면을 반복시킨다.

한창 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장면은 <엘렉트라> 중에 딸 엘렉트라와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대립하는 대목. 딸은, 정부와 짜고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증오하고, 어머니는 자기 행동이 정당했다고 변호한다. 오순택씨의 강의법은 일단 학생들이 하는 연기를 그냥 지켜보는 데서 출발한다. 엘렉트라와 어머니가 얼굴을 맞대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대목, “컷”을 외치는 감독처럼 그는 배우들의 동선을 지적한다. 관객이 볼 수 없는 위치에서 극중 행위가 이뤄진 탓이다. “표정과 움직임이 관객의 시선에 들어오는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무대원칙의 기본은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는 “카메라 렌즈는 가장 예민한 관객입니다”라고 덧붙인다. 오순택씨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대목은 리액션. 누군가 어떤 행동이나 대사를 했을 때 다른 배우들도 그에 걸맞은 반응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럴 때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묻고 교정이 이뤄질 때까지 연기는 되풀이된다.

반복된 연습은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됐다. 2시간 만에 5분간 쉬었다 하자는 오순택씨의 말에 학생들의 얼굴에 “이제 살았다”는 표정이 새겨진다.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진행되는 강의지만 5분 휴식 외에 3시간을 꽉 채워서 계속되는 실습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봐도 쉽지 않다.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도 학생들은 끊임없이 극중 인물의 생각과 행위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무대에선 내가 왜 지금 이런 행동이나 대사를 해야 하나?”를 끊임없이 생각하라는 오순택씨의 주문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모방에서 리얼리티로 향하는 과정”이다. 시작은 단순히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한 연극을 모방하는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감정과 사고에 접근하면서 표현 하나하나에 생의 의지가 깃든다.

조국의 언어와 감성으로 연기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탓일까? 그리스 비극의 낯선 울림에서 연기의 깊이를 가르치는 그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할리우드의 한국인 배우 오순택의 연기인생 40년

▶ 연극원 연기실습실을 찾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