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 영화지만, 연극도 한번 맛을 들이면 헤어나기가 힘들다. 특히나 극장에 어둠이 쌓이고 나직하면서도 우렁찬 배우들의 호흡을 직접 느끼게 되면, 어떠한 특수효과도 따라가지 못할 현실감과 박진감에 중독되고 만다. 특히나 좋은 연극일수록 배우들이 뿜어내는 개인기뿐만 아니라, 서로간에 주고받는, 거의 치고받는 대사와 기(氣)의 교류는 머리카락이 주뼛 설 정도의 감동이다. 솔직히 캐릭터들간의 교류인지 배우들간의 교류인지 헷갈릴 경우도 많지만, 그러한 감정흐름을 따라잡는 재미는 서스펜스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미를 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극장 안이 더웠나 추웠나, 그날따라 배우 컨디션이 어떠했나 하는 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응축을 만들어내기에, 배우와 일체감을 느끼는 감동은 크기에 비해 횟수가 극히 적은 편이다. 또 그러나, 눈을 돌려 찾아보면 이 서스펜스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바로 바보상자라는 TV가 느닷없이 감동의 신천지로 돌변하는 것이다. 케이블 및 위성 들어오는 곳에 사는 이들은 당장 지역방송사에 문의해서 쏟아지는 해외 TV시리즈들을 만나보십시오. 정말 끝내줍니다! 외국산이라 뭐가 통하기나 할까, 싶지만 TV 전파를 뚫고서 전달하는 배우·캐릭터들간의 박력과 치고받기, 팽팽한 긴장감은 어두운 극장의 스포트라이트만큼이나 신비롭다. 특히나 좋은 배우에 좋은 각본, 그리고 원래 이야기 자체가 긴장감을 선사한다면, 금상첨화다. 부럽게도 미국에는 이런 요소를 갖춘 시리즈가 정말로 많다. 농담이 아니다.
TV시리즈 <웨스트 윙>은 처음에는 어딘가 껄끄러운 드라마이기는 했다. 워싱턴 정치계, 그것도 백악관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대통령을 하늘같이 모신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이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는 주인공이라는 것- 요즘 같은 정치불신시대에는 환영을 잘 못 받는다. 특히나 FX사업 등으로 해서 ‘미국 정치계=깡패’라는 등식이 성립해 있는 시기엔 더욱 더.
<웨스트 윙>이 진실로 시청자를 사로잡는 것은 ‘사람들’이다. 정치계라는 판에 뛰어든 사람들이 있고, 별나라에서 끼리끼리 노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있고, 정치인과 일반인이라는 갭을 메워주고 그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연기자들이 있다. <웨스트 윙>의 배우들은 정말로 연극무대에 선 듯이 서로의 폐부를 찔러가며 말을 주고받는다. 카메라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주인공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메인 캐릭터만도 최소 9명이 있으며, 이 사람 저 사람 한꺼번에 떠드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 모든 사람들이 살벌정치계라는 배경하에 서로 독설을 퍼붓고 심중을 떠보는 것 자체가 서스펜스를 만들고, 이 서스펜스의 진정한 근원은 배우 각 개인들이 내뿜는 연기력이다.
‘웨스트 윙’- 백악관 서관. 비서실 간부들이 일하는 곳이다. 대통령, 상원의원, 언론담당 보좌수석, 차석, 대통령의 친구, 대통령의 식구, 대통령의 적, 그리고 지금까지 나열한 사람들의 비서들. 그 모든 사람들이 쏟아붓는 공력과 기, 압도당하는 게 즐거워질 정도로 배우·인물들은 진짜 연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세금만 제대로 물면 합법적으로 로비가 가능하고, 국민보다도 실권을 잡은 자들을 얼마나 포섭하느냐에 정권의 운명이 달린 나라 미국. 미국의 정치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서로가 어떻게든 정치권력을 어디까지 얼마나 장악하느냐 하는 제로섬 게임을 벌인다.
사람 수는 한정되어 있고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내 편을 따르는 머릿수를 상대방보다 늘리는 것이다. 이들이 매 상황상황을 넘기는 것은 오직 재기와 재능과 언변,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을 통해서다. 아무리 진흙탕 싸움을 벌여도, 이들의 싸움에서 사람을 잡아끄는 기가 느껴져서 함부로 눈을 뗄 수 없다. 잘 싸우는 싸움은 보는 것 자체가 공부가 된다. 때로 인간적 감동을 주려고 하긴 하는데, 이건 오히려 과잉으로 보이고, 주인공들이 극적 상황상황에 맞부딪쳐 나아가는 순간들이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바쁘게 남 설득하고 살면서 인간적이 된다는 것이 진짜 불가능이니까(설득에는 필수불가결 협박이 따라다닌다).
<웨스트 윙>을 보다보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노는 동안 국민은 도대체 뭘 하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확실히 국민은 정치계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 같다. 직접선거를 하는 우리나라만 해도 정치계와 민간인의 갭이 큰데, 간접선거인 미국은 오죽 더 할까? 인간적으로 보이는 제스처는 모두 거짓일 공산이 높고, 오히려 상황에 최선을 다해 부딪치는 것이 인간적으로 보이는 세계. 이것이 정치세계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마지막 단락에 적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 바다 건너 다른 나라 정치계를 다룬 드라마니까 별 신경 안 쓰고 배우들의 호연을 즐기면 된다. 그러면 기충전 90% 목표를 달성하며 <웨스트 윙>을 즐길 수 있다. 남명희/ 자유기고가 zoo@zootv.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