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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이었다면
2002-06-05

조선희의 이창

만일 <생활의 발견>을 10년 전에 보았더라면 ‘백해무익한 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을러터진데다 여자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니고 사회·국가적 차원의 문제에 대해 무지·무력·무관심한 그런 유형의 주인공에 대해 ‘백해무익한 놈’ 하고 짜능냈을 것이다.

만일 <거짓말>을 10년 전에 보았더라면 ‘쓰레기 같은 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관방에 처박혀 때리고 맞고 하면서 성적인 판타지에 골몰하는 주인공을 ‘인간 쓰레기’로 간주했을 것이다.

아마 10년 전쯤엔 적어도 내 자신은 사회적·역사적으로 쓸모있는 일을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런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쳐도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을 만큼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행위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내용을 갖는 세상, 그 표리부동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나는 점점 판단을 조심하게 되고 큰목소리 내기를 두려워하게 됐던 것 같다.

대학 때는 누군가 장애인시설에 가서 자원봉사한다고 했으면 ‘또라이’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소박한 선의를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품는다. 물론, 100명이 장애인 뒤치다꺼리하는 것보다 1명의 정치인이 장애인시설에 관한 훌륭한 법안을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 100명은 쓸데없는 헛수고할 필요없이 정치인 바짓가랑이만 잡고 늘어지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인은 정치인의 일을 하는 것이고 개인은 개인의 일을 하는 것이다. 어떤 정치인이 훌륭한 입법행위를 하는 것은 내가 문장을 제대로 쓰고 오자를 안 내려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또한, 정치인 한 사람이 훌륭한 입법행위를 하는 것보다는 장애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문화적·경제적으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차별 없는 세상’으로 가는 길의 입구가 어느 쪽인지 나는 아직도 헷갈린다. 가령, 북유럽식 사회주의라면, 사회보장제도로 사회구성원의 전체적인 생활수준을 끌어올려서 장애 때문에 가난하거나 실직해서 불행한 사람이 없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아무래도 차별 없는 세상에 가장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자살률에 관한 기록을 보면 늘 스웨덴이나 노르웨이가 10위권 안에 들고 제3세계 빈국들은 자살률이 한참 낮으며 행복지수가 가장 높게 나타난 나라가 방글라데시였다는 역설은 또 뭐란 말인가. 절대빈곤에서 벗어난다고 개발독재를 했고 그 폐해가 혁신운동에 불붙였는데 이제 와서 북유럽 사회주의를 생각하다보니 엉뚱한 역설이 얘기를 원점으로 돌려보낸다. 이런!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이 달라 보이고 생각도 달라지는 게 좋다. 확신을 잃은 생각을 머리에서 퍼내지 않고 그대로 담고 다닌다면 그건 매일 회칠한 미라를 껴안고 잠자리에 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든 사안에 대해 상대주의에 빠지는 일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문제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결핍이 없어서 삶의 목표를 잃고 풍요가 권태로워서 자살의 유혹을 느낀다고 해도 모든 구성원들을 절대빈곤에서 건져내고 청결한 주거환경을 마련해주고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인간다운 사회인 것이다.

내가 요즘 노력하는 것은 고작, ‘가족이 비리에 연루됐으니 전두환이나 DJ나 다같이 나쁜 정치인’이라거나 ‘너도 거짓말하는데 내가 거짓말하는 건 어떠냐’는 식의 상대주의에서 빠져나와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분별심을 갖는 것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내 경험으로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판단하고 발언하게 된다.

나는 김규항씨가 현실과 경험으로부터 유리된 도그마에 점점 빠져드는 것 같아서 위태롭다.

10년 전이라면 나도 자신의 경험과 행동으로 보증하는 소박한 진실보다는 거창한 논리에 열광했을 것이다. 내 스스로도 논리적으로 아귀만 맞으면 어떤 주장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니까.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이 애인의 남편을 규탄하는 대자보를 써서 감나무 가지로 길바닥에 고정시켜놓는 걸 보고, 추상미가 “우리 남편은 우리한테 없는 게 있어요. 그 사람은 남을 위해 일해요”라고 말할 때 김상경이 도무지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만일 10년 전이었다면 분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대목이 그냥 웃겼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아마도 나는, 사회·국가적으로 큰일은 고사하고 사소한 일에 우스꽝스런 열정을 보이는 인물에 대해 어떤 일말의 애정과 연민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무해무익한 인간으로 사는 것도 쉬운 건 아니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조선희/ 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