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뮤지션에게 연초는 비교적 한가한 시기다. 연말을 보내고 지친 팀원들은 각자 휴식 기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무엇을 할까 하다가 가족과 함께 대만 여행을 가기로 했다. 휴가를 길게 쓰는 것도 오랜만이고 다른 나라에 가는 것도 오랜만이다. 익숙지 않은 여행이라 어색하면서도 마음이 설렜다.
타이베이 시내에 며칠 머무는 일정을 잡았다. 주로 박물관이나 시내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 여행을 자주 가지도 않지만 계획을 하고 명소를 많이 찾는 편은 더더욱 아니다. 한가하게 돌아다니며 바닥의 타일이나 돌멩이 같은 것을 보거나 읽지 못하는 간판을 구경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다. 특별한 경험을 수집하는 쪽이 아니다보니 새로운 곳의 인상이나 분위기, 느낌들에 집중하는 편이다.
이번 대만 여행에서는 공항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 지하철과 거리에서 보이는 경사로와 턱 없는 기물들이 인상 깊었다. 동행인이 알려주어서 깨달은 것인데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도블록과 횡단보도 사이에 턱이 없었다. 시내에 수많은 오토바이가 움직이고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데도 그 사이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바닥으로 눈이 향하게 되니 걸어가는 곳들이 모두 이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인도는 상대적으로 폭이 넓었고, 건물 구조 때문에 단차가 있을 법한 곳들은 모두 경사로가 설치돼 있었다.
공원 놀이터와 산책로에도 경사로 데크가 놓여져 있어 이동이 편했고 어디에서나 장애/가족용 화장실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런 시설물들이 새로 만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실제로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비싸고 좋은 시설물을 설치하고 새로 들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들이 그 자리에 있고 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수도가 밖에 간이로 설치되어 있는 간이 화장실로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고 화장실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은 서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경사로 데크도 화려하고 번듯하게 공사를 해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곳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탄 채로 탑승할 수 있는 그네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어느 날에는 지하철을 타고 있는데 직원이 탑승해서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며 출입구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았더니 시각장애인 탑승객의 하차를 돕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돌아서니 안내견의 탑승에 협조해 달라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시내를 운행하는 버스들은 정차할 때 모두 한쪽으로 차체를 기울여서 하차를 돕는다. 번화한 곳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한적하거나 쇠락한 느낌이 나는 곳까지 도시 전체가 이동하기 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인상을 받은 것이 나만은 아닌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대만을 방문한 유튜버이자 작가인 구르님의 트위터 글을 보았다. 휠체어를 타고 여행하면서 대만의 지하철과 철도를 체험한 이야기였는데, 안전벨트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지하철이라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많았다는 내용이었다. 당사자로서 느낀 점이어서 그런지 더욱 와닿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나 역시 더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봤던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고 지나가는 것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그런 점에서 장애인들을 없는 셈 치고 있는 서울 지하철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좋아하던 노래가 조금 다르게 들리는 순간이다.
<춘천 가는 기차> - 김현철
조금은 지쳐 있었나봐 쫓기는 듯한 내 생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어보며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행
지난 일이 생각나 차라리 혼자도 좋겠네
춘천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5월의 내 사랑이 숨 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 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가네
그리운 사람
차창 가득 뽀얗게 서린 입김을 닦아내 보니
흘러가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술 한 잔 마시고 싶어
저녁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
춘천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5월의 내 사랑이 숨 쉬는 곳
지금은 눈이 내린 끝없는 철길 위에
초라한 내 모습만 이 길을 따라가네
그리운 사람 그리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