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일들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가지 사건이나 분위기 같은 것들만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대충 끝내고’ 사건인데,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화장실 청소 당번을 맡은 나와 몇명의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생에게 화장실 청소가 쉽거나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충실하게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날이었다. 선생님이 친구들을 불러서 화장실 청소를 그렇게 대충 하면 어떡하냐고 혼을 내었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우리는 당황했고, 선생님이 워낙에 강하게 말을 해서 뭔가 잘못했나 하는 마음에 내심 억울해하면서도 움츠러든 채로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났으면 이 사건은 그저 그런 좀 억울하게 혼난 일로 정리되었을 것이고, 크게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의 억울한 점은 따로 있었다.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한 친구의 일기장 때문이었는데, 선생님은 일기장 검사를 한 후 네가 청소를 ‘대충’ 하고 집으로 갔다고? 그러면 어떡하니 하고 혼낸 것이었다. 친구는 청소를 일단 끝내고 집으로 갔다는 의미라고 주장했지만 그 말은 통하지 않았다. 대강, 얼추 같은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한 초등학생의 부족한 어휘력 때문이었을까, 선생님의 문해력 부족이었을까. 아니면 선생님 스스로도 알면서 입장을 철회하지 못한 자존심 같은 것이었을까. 누구나 자라면서 어른들과 세상에 실망하고 그 수준이 높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을 텐데, 나에게는 그때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가 그 이후에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어른이 되었기를 바라기도 하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대충’이란 말은 나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뭔가 제대로 하지 않고 넘어가는, 그러면 안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러나 ‘대충’의 사전적 의미는 그보다는 조금 더 중립적이고 실용적이다. ‘대강을 추리는 정도로’ 하는 것이 대충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충 한다고 해도 일단 무엇인가를 추린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뭐라도 일단은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이 치밀하고 충실하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해내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직업 창작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그 자체다. ‘그래 뭐가 되었든 어떻게든 완성해야 한다’ 하고 생각했던 마감의 시간들을 떠올리고 나니 그만큼 대단해 보이는 말도 없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대충 하는 것’을 올해의 목표로 삼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충 ‘하는’ 것에 방점이 찍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고, 또 잘하고 싶은 마음에 항상 속으로 분주한 날들이 많았다. 올해는 일단 대충 하자고 마음먹고 몸을 분주하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일단 ‘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나면 언젠가는 ‘대충’을 떼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누군들 잘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조바심내지는 않으려고 한다. 하기도 전에 대충을 떼고 싶어 하는 순간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 해서.
<새해 복> - 장기하와 얼굴들
어머니 아버지 새해 복 새해 복
할머니 할아버지 새해 복 새해 복
친구들아 너네들도 새해 복 새해 복
언니 오빠 동생 동창 친구 원수 아군 적군
이 사람 저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너도 나도 모두 다 새해 복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 해야지 (안돼) 노력을 해야지 (안돼)
새해 복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 해야지(안돼)
열심히 해야지 (안돼)
흰눈 내리는 날에도 새해 복 새해 복
하늘이 파란 날에도 새해 복 새해 복
가버린 작년에 있던 슬픈 일들은 잊어 버리고
왠지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새해 복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 해야지 (안돼)
노력을 해야지 안돼 새해 복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 해야지 (안돼) 열심히 해야지 (안돼)
올해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 말하고 싶겠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 말하고 싶겠지
새해 복 많이 받으면 돼
새해 복만으로도 돼
절대 잘 하지 마 (돼) 노력을 하지 마 (돼)
새해 복만으로도 돼
니가 잘 하지 마 (돼) 열심히 하지 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