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3)
2002-05-31

칸이여, 나의 슬픈 열대여!

위대한 크로넨버그! <스파이더>

<스파이더>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여기서 결판이 난 것 같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Spider, 경쟁부문)를 보는 순간 나는 중얼거렸다. 아마도 (심사위원장의 자리에 앉은) ‘데이비드’는 (경쟁부문에 초대된) 또 한명의 ‘데이비드’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우선 오해하지 말 것. 이 영화는 크로넨버그의 생체실험이 아니며, 더더구나 하드고어나 SF 장르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크로넨버그의 ‘엽기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팬클럽들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거의 멈춘 듯이 조용하고 더듬거리는 중얼거림 이외에는 다른 대사도 없이, 마치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정지한 것처럼 진행된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거미-인간에 대한 임상관찰이다. 그건 프로이트의 쥐-인간에 관한 보고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만일 좀더 정확한 비유가 필요하다면 한스 소년의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영화에는 크로넨버그의 강박관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시 한번 여기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나’에게서 ‘그것’에게로 넘어가는 불행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또는 결국 아버지와의 싸움 속에서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카프카의 갑각류 상상력의 세상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그러니까 <스파이더>는 <플라이>를 거쳐 <벌거벗은 점심>을 넘어서서, 이제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해 던져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유배의 땅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크로넨버그는 <크래쉬>에서 J. G. 발라드의 소설에 대한 독후감으로 원작을 다시 구성한 것처럼, 패트릭 맥그레이스의 컬트 원작소설을 갈가리 찢어놓은 다음 다시 퍼즐처럼 맞춰나간다(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패트릭 맥그레이스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같이 썼다). 패트릭 맥그레이스의 부언설명. “시나리오가 끝나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마치 내 소설에서 생긴 일이 무언지를 내가 모르게 되었습니다.” <크래쉬>에서 열정적인 순간들은 모두 사라지고 금속성으로 가득 찬 차가운 분석과 가까스로 유지되는 형살들만 남은 것처럼 여기서 다시 크로넨버그는 충분히 피와 살이 고기가 되고, 잡아먹고 먹히는 관계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신중하게 피해간다. 그렇다. 이건 정말 라캉이 말한 ‘실패한 가족소설’의 세계, 깨어진 거울의 단계, 정신분열에로 뛰어드는 산책이다.

아주 신중하게 처리된 첫 장면. 기차가 도착하고 나면 사람들이 내린다. 사람들은 앞질러 카메라 앞으로 지나가고, 거미-인간 스파이더(랠프 파인즈)는 맨 마지막에 내린다. 벌벌 떨면서, 느린 걸음으로, 말을 더듬으면서 걸어오는 스파이더는 그 걸음으로 재활병원을 찾아간다. 주의할 점. 이 대목부터 거리에는 시종일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씩 거리가 나오지만, 모든 집의 창문은 꽁꽁 닫혀 있고, 스파이더가 머무는 병원의 간호사와 몇명의 병자들 이외에는 영화에 더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건 런던의 거리에서 촬영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거리 전체를 마치 세트장처럼 사용하여 스파이더의 마음속의 풍경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실재가 표현주의영화의 폐쇄공포증에 질린 것처럼 보여진다. 시대를 알 수 없는 런던의 풍경은 마치 공습경보가 걸린 것처럼 황량할 뿐이다. 그 안에서 스파이더는 이따금 밤이면 거리 바깥을 산책하면서 남의 집을 기웃거리다가 창문 너머 집안을 보면서 슬그머니 자신의 과거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그는 온전하게 과거로 들어오지 못하고 한 화면 안에 어린 스파이더와 현재의 스파이더가 동거한다. 스파이더는 소년 스파이더의 말을 반복하기도 하고, 때로 그를 앞질러 대답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속이는 건지, 누가 누구를 훔치는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어린 스파이더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버지가 술집에서 만난 천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그 여자와 시도때도 없이 놀아나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창고에서 섹스를 벌이기도 한다. 그런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는 술집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마침내 그 광경을 보고야 만다. 그런 어머니와 마주친 아버지는 삽으로 어머니를 때려죽인 그 더러운 여자와 함께 낄낄대며 땅에 묻어버린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 술집여자를 어머니의 자리에 앉힌다. 이제 스파이더는 그 여자를 죽일 생각에 몰두하면서 자기 방에서 실뭉치를 풀고 마치 거미처럼 이리저리 칭칭 묶여가면서 온 방안을 거미둥지로 만든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한 가지 더. 어린 스파이더의 어머니와 술집여자를 미란다 리처드슨이 일인이역을 한다(또는 좀더 정확하게는 일인삼역). 크로넨버그는 이걸 숨길 생각이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인이역으로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무대극처럼 영화를 진행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퍼즐은 반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자리에 놓여 있다. <스파이더>는 <크래쉬>를 반대로 사유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현실의 질서 속에서 점점 더 카오스 이론의 판타지로 유혹당한 주인공들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어떻게든지 스파이더를 판타지로부터 실재의 사막에 끌어내기 위해 크로넨버그는 안감힘을 쓴다. 그러니까 여기서 크로넨버그는 자기 영화 전체에 대한 성칠을 시도한다. 판타지의 세계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경이와 쾌락, 날카롭게 베인 상상의 속살, 바로크적 뒤틀림, 끈적거리는 분비물들. 그리고 육신의 자유자재의 변형모델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크로넨버그는 그런 것들과 싸운다. 당신이 믿지 못하겠지만, <스파이더>를 보면서 연상하게 되는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돈>이다. 저 간결함과 잔인함, <리베라시옹>의 표현. "위대한" 크로넨버그!

김홍준 선배와의 전망과 심야잡담

나는 칸에서 김홍준 선배와 같은 방을 썼. (참고할 만한 충고. 영화제에 가면 누구와 함께 방을 쓰느냐는 아주 중요하다. 재수없으면 술 마시는 일로 밤을 지새우기 딱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일로 온 것이기 때문에 낮에는 서로 다른 영화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서울에서 아침 8시쯤 되는 시간이면 다시 만난다. 영화제가 시작하고 닷새째 되는 날의 대화 내용 중의 일부 채록.

“나는 이번 칸의 퍼즐은 자아-반영(self-reflexivity)인 것 같아. 뭐랄까, 다시 한번 작가주의를 생각해보자는 제안 같은 거. 그러니까 이번 칸에는 유난히 거장들을 부른 거 아닐까. 그렇잖아. 사실 이번 칸의 경쟁부문에서 발견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이름이 없잖아. 구태여 꼽아야 한다면 지아장커와 가스파르 노에. 하지만 가스파르 노에는 이미 내가 돌아다닌 판타스틱영화제들 사이에서는 열혈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거든. 만나는 프로그래머들마다 정말 대단한, 그리고 새로운, 하지만 두번 보고 싶지는 않은, 이라는 평가가 이구동성이거든. 물론 거기 나도 포함되지(웃음) 지아장커는 성일이도 알다시피 이미 포스트(後)화어권영화에서 그 중심에 있는 주인공인 셈이고. 이 명단을 통해서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건 영화를 다시 창조하는 사람들의 손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믿음의 부활 같은 거라고 생각해. 포스트모더니즘이 영화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난자질하면서 그 안에서 패스티시와 시뮬라크라들만이 날뛰고 있다고 비웃을 때, 거기에 평론가라는 인간들이 동조해서 같이 영화를 능멸하고 있을 때, 사실 위대한 작가들은 그런 담론 바깥으로 나와서 고립되어가고 있었잖아. 아트 하우스 영화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휘말려들 때 칸가 그 유행에 일정 부분 공공연하게 거래한 건 사실이거든.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 손을 들어주고, 그 이후의 명단을 보면 영화는 그저 세상의 표면에 반사하는 사물의 거짓말쟁이처럼 둔갑했잖아. 그 12년간에 대한 칸의 반성과도 같은 명단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영화를 창조의 기쁨으로 되돌려주는 거. 어쩌면 훗날 작가주의의 두 번째 물결은 2002년 5월 칸에서 시작되었다고 할지도 모르지. 지금 우리가 그 현장에 와 있는 거라구.” (웃음)

그렇다. 다시 영화에서 진정성이 문제가 된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 정말 그렇게 되기를 나는 간절하게 소망한다. 영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다시 지구/지역의 담론과 모더니즘이 우리를 두리번거리게 만들고 있을 때, 소문자 타자들이 날뛸 때, 속도의 미디어가 영화의 예술성에 침묵을 강요할 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칸에서 영화적 경험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시간, 그 불안의 의식, 말하자면 그 존재론을 근거하게 만드는 작가들의 귀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작가주의는 죽었다. 새로운 작가들이여, 영원하소서. 이야기를 끝내고 창문을 닫을 때 새벽 3시24분의 밤하늘의 별들은 새로운 성좌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년들의’ 그 사회주의!

벨기에에서 온 다른 한편의 영화 <하늘, 한 점>(Une part de ciel 주목할 만한 시선, 황금카메라 경쟁부문)은 복지국가에서도 투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빨갱이’영화이다. 또는 푸코가 살아 생전에 보았다면 기꺼이 지지했을 것이다. 베네딕트 리에나르는 그의 데뷔작을 만들기 위해서 5년 동안 감옥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인터뷰를 했으며, 지난 10년 동안 6편의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든 그의 관심은 여기서도 여전하다. 감옥에 수감된 여자들은 매일 공장에서 일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여기서 여자들은 공장에서 일을 하는 여자들과 만나게 되고, 질문을 갖게 된다. 우리가 죄수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이 체불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노동은 국가에서 착취하도록 방치함으로써 우리의 감옥 안에서의 인권은 도둑맞는 것이 아닌가? 죄수 여인과 노동자 여인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고, 동지로서 서로 손을 마주잡고 싸우자고 끌어안는 과정을 때로는 흥분하면서, 하지만 하나씩 따져 물어보면서 일보 전진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물론 이제 시작이라는 다짐으로 끝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아직도 이런 영화가 좋다. 이런 영화를 볼 때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이 부끄러워지지 않는다.(계속, 독자 여러분에게. 아직 칸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다음주에 칸에서 본 영화들의 '부문을 막론하고 독단과 편견으로' 10 베스트영화들을 뽑아볼 참이니 기대하실 것. *^^*). 칸=정성일/ 영화평론가

사진설명

1. <스파이더>

▶ 제55회 칸의 한국영화들, 열띤 취재공세

▶ 전세계 주요 언론들의 경쟁부문 상영작들에 대한 별점

▶ <죽어도 좋아> 리뷰 - 올리비에 세그레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