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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2호 [기획] 도약과 해체라는 이중의 움직임 ‘일본영화의 새로운 물결’
김예솔비 2022-10-07

특별 기획프로그램 ‘일본영화의 새로운 물결’

동시대 일본 영화의 경향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먼저 경향으로 불릴 만큼의 치우침 내지는 선도적인 미학이 있다는 가정. 두 번째는 이러한 흐름이 일본사회와 어떠한 연결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가정이다. 이는 사실상 주어인 ‘일본’의 자리에 어떠한 국적을 가져다 놓아도 무관한 이야기다. 새삼스럽게 당연해보이는 전제들을 다시금 상기하는 이유는 두 개의 가정이 모두 ‘일본 영화’의 장 속에서 멈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오시마 나기사,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 이후 일본 영화는 잠시간 그 명맥이 중단되었다.

<해피아워>, <아사코1&2>에 이어 <드라이브 마이 카>로 국제적인 명성을 각인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출현은 다시금 일본 영화의 장을 두 가지 전제와 접속 재개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유운성 평론가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가 일본 사회를 무대로 하면서도 동시대적인 풍속을 관통하고,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장르의 관습에 기대지 않는 독자적인 미학과 방법론을 보여주면서 일본 영화에 부과된 ‘이중 구속’을 뛰어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동시대 일본 영화들은 유운성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지향하더라도 봉준호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이중 구속을 부단히 의식하면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통찰대로 “지아 장커와 아르노 데스플라샹”으로 양분되는 계열들(<영화 장화>) 사이에서 진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나의 작은 나라 스틸

그러므로 동시대 일본 영화의 경향에 대해 묻는 일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가 벗어나고 있는 ‘이중적 구속’의 총체를 파악하는 작업과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차세대 하마구치 류스케를 찾는 일은 하마구치의 영화와 닮은 것들을 탐색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이중적 구속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벗어나고 있느냐가 발굴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특별전으로 기획된 ‘일본 영화의 새로운 물결’의 목록에 속한 영화들은 이러한 일본 영화에 기대되는 압박들을 의식하면서, 그 양분된 계열들 사이에서 각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들 사이에서 공통된 소재나 주제를 꼽는 것은 게으른 접근일뿐더러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잣대 삼아 그 유사성을 기준으로 영화를 분류하지도 않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러한 이중적 구속을 매우 명확한 주제 의식과 소재로 뛰어넘으려는 영화들과, 쉬이 파악되지 않는 미묘한 정념 속에서 구속의 힘을 다소간 해체하려 드는 영화들로 나뉜다는 것이다.

벼랑 끝의 남매 스틸

<나의 작은 나라>와 <벼랑 끝의 남매>는 정확히 전자의 전략에 들어맞는 영화들이다. <나의 작은 나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조감독 출신인 가와와다 에마 감독은 일본 사회에 정착하려는 쿠르트 난민 가족이 겪는 고초들을 따라간다. 국적은 쿠르트인이지만 일본에서 성장기를 겪은 주인공 소녀가 처한 정체성의 혼란과 난민이라는 신분이 드러내는 국경과 경계의 문제를 겹쳐놓는다. <벼랑 끝의 남매>는 그 소재와 인물 설정이 영화가 취하는 전략의 거의 모든 것을 발설하는 종류의 영화다. 장애가 있는 여동생과 단둘이 살며 생계를 유지하는 주인공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동생을 성매매에 동원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이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와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가 보여준 적 있었던, 그리고 하스미 시게히코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던 영화에 내재된 ‘불편함’을 다시금 불러들이는 예시다.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 스틸

두 영화는 일본이라는 영토 위에 난민이라는 동시대적 경계 구획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본성과 윤리의 잣대를 교란시키는 존재들을 기입한다. 한편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은 앞선 두 영화처럼 정치적인 소재를 택하고 있지 않지만, 이 영화가 택하고 있는 무언(말 없음)의 전략은 국적을 망라하는 초국가적인 경계 위에서 일본 영화의 국제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힘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오모리라는 로컬의 배경으로 한 아이의 일탈과 모험이라는 지극히 세계공통의 서사를 흘려보내는 이 영화는 무성영화가 가지고 있었던 국경을 무화시키는 역량을 상기시킨다.

반면 후자의 영화들은 소재나 전략으로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말과 대사의 정서적 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들은 언뜻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들과 닮아 있는 듯 하면서도, 전적으로 하마구치 류스케의 자장 속에서 파악되지만도 않는다. 이 영화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적 유산을 덧붙이고 싶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다. 우연찮게도 <세 번째, 정직>과 <우리 집>에는 <큐어>의 마미야처럼 기억 상실을 호소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기억 상실이라는 소재의 접점이 아니라, 이 접점 속에 무언가를 초기화하고자 하는 영화적 충동이 내재되어 있고, 바로 이 점을 하나의 경향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정직 스틸

<세 번째, 정직>은 노골적으로 하마구치 류스케와 맞닿아 있는 영화다. <해피 아워>의 ‘정신적 속편’이라는 영화의 설명 답게 <세 번째, 정직>은 <해피 아워>의 공동 각본가인 노하라 타다시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한 영화이며 <해피 아워>의 출연진 대부분이 등장한다. <해피 아워>에서 준 역을 맡았던 배우가 <세 번째, 정직>에서는 미카코라는 여성으로 등장하며 영화의 중심에 선다. 남편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허망하게 앉아 있는 미카코 앞에 나타난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포함해 모든 것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미카코는 소년에게 생존자라는 뜻인 나루토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강한 소유욕을 보이며 돌보게 된다.

묘하고 나른해보이는 소년의 외양은 즉각적으로 <큐어>의 마미야를 떠올리게 한다. 마미야가 끝내 미지의 ‘X’로 남는 반면, 소년의 친부가 나타나면서 소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억 상실의 모티프가 기억을 되찾거나, 새로운 삶에 완전히 편입되는 양 쪽의 결말로 귀결되는 반면 <세 번째, 정직>의 기억 상실은 모호하게 열려있는 채로 남는다. 소년은 친부나 미카코에게 되돌아가지 않으며 영화의 끝에 가서 그가 기억을 되찾았는지의 여부 또한 불투명하다. 따라서 소년의 상실된 기억의 공백을 대신 채우려 하는 친부의 진술은 그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게 남는다. 허나 눈여겨볼 점은 이때 친부가 소년을 떠나야 했던 이유를 말하며 도호쿠 지진(동일본 대지진)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분명 어떠한 잔재, 자국을 남기고 있는 역사들이 기억 상실이라는 불확정적인 기억의 상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기억 상실의 기억의 공백과 빈 틈을 재구성하는 시도 속에서 사건의 이후와 그 잔재들을 암시한다.

빛의 노래 스틸

<빛의 노래> 또한 말이 중요한 영화다. 문학(하이쿠)를 영화로 각색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오히려 <세번째, 정직> 만큼이나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닮아 있다. 영화는 하이쿠의 리듬을 닮아있기에 그 의미가 쉬이 파악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기억 상실이나 기억의 재구성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묘한 방식으로 기억의 초기화 효과를 촉발한다. <빛의 노래>는 4개의 하이쿠를 각기 다른 이야기로 각색한 4개의 챕터로 나뉜 영화다. 4개의 이야기는 희미한 겹침의 단서만을 남긴 채 서로 동떨어져 있다. 이러한 단절은 영화가 새롭게 도약하는 듯한 재출발의 감각을 자아낸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완전히 절단되지는 않으면서 하나의 영화 안에 기억의 갱신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각 장에는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혹은 막 어디론가로부터 돌아온 사람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세 번째 챕터에서 유키코라는 여자의 여행을 따라간다. 유키코는 아버지가 맡겼던 필름 사진을 찾으러 한 지방의 사진관에 들른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사진관에 있던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진 속 장소에 동행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아버지의 사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앞서 1장에서 히로시마에 있다는 유키코의 말과 다르게, 3장에서 유키코가 여행하고 있는 곳은 그와 한참 떨어진 훗카이도다. 영화는 한번도 히로시마를 보여주지 않지만 앞서 히로시마에 있다는 유키코의 말이 그녀의 여정 내내 달라붙는다. 사진관 직원이 찍은 영화 속에서 철거되고 있는 집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원폭돔을 연상시킨다고 말하면, 지나친 추측일까. 사진들을 가지고 아버지의 기억을 재조합하는 유키코의 여정은 상실을 묘사하지 않으면서 상실의 잔재를 더듬는 미묘한 정념의 작용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집 스틸

앞서 두 영화가 다분히 하마구치 류스케를 연상시키는 드라마 속에서 말의 힘에 다소간 의지하는 영화였다면, <우리 집>은 바로 이 기억 상실을 통해 기이함이라는 정념을 묘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우리 집>은 독립된 이야기처럼 보이던 두 개의 시공간이 점차 같은 집을 공유하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기이함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집>에도 기억 상실에 걸린 여자가 등장한다. <세 번째 정직>에서 친부가 나타나 불확정적이게나마 기억의 실마리를 주었던 것과 달리 <우리 집>의 여자는 모호한 존재로 남는다. 여자의 존재뿐만 아니라 두 개의 시공간을 뒤섞는 미묘한 신호들만 있을 뿐, 일관된 서사로 정립되지 않아서 영화에는 더욱 큰 미진이 남는다. 여자가 끝내 열지 않는 선물 상자는 끝내 열리지 않은 채로 영화가 끝난다. 여자의 기억 상실은 영화가 설명되지 않는 기이함을 촉발할 수 있는 창구이자 수단이 된다.

이 영화들은 앞선 세 개의 영화들처럼 소재나 주제의 측면에서 일본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접합을 드러내지 않지만, 일본 사회에 내재된 기억과 충동들을 암시하는 것으로 일본 영화에 부과된 과업에 생경한 의문을 던진다. 도약과 해체라는 이중의 움직임 속에서 동시대 일본 영화는 새로운 ‘일본적이면서 세계적인 것’을 모색하고 있다. 둘 중 무엇이 나을까. 아마도 아오야마 신지였다면, 어떠한 방식을 따르든 궁극적으로 영화는 활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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