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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원 리브즈 포에버>
2002-05-30

본드걸의 반란

60년대 영화에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집단과 싸우는 스페셜 에이전트가 자주 나온다. 시리즈를 필두로 <세인트>, 언클의 나폴레옹 솔로가 활약하는 TV시리즈 등 대단한 걸작은 아니라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이런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질은 반반한 외모와 말쑥한 의상, 느끼한 말솜씨다. 북슬북슬한 가슴털과 팽팽한 엉덩이도 빼놓을 수 없다. 악당의 정부나 동료 요원, 적국 스파이, 순박한 원주민 처녀의 헌신이 없이는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는 머리를 비우고 보는 게 보통이지만 그래도 노골적인 남근 중심주의가 불편할 때도 있다. 파트너가 007보다 더 현란한 발차기를 선보이더라도, 여성 상관이 나오더라도 영화 속에서 여자가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수동적 아이템인 건 달라지지 않았다. 볼 때야 별 생각없이 흥미진진했더라도 여자 입장에서 나중엔 왠지 울컥하는 게 시리즈다. 영화 속에선 요염하게 미소만 짓고 있지만 혹시 본드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노 원 리브즈 포에버>는 본드걸 자리를 통쾌하게 걷어차버린 본드걸의 이야기다.

늘씬한 다리와 매혹적인 녹색 눈동자의 케이트 아처는 외모로만 보면 영락없는 본드걸감이다.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경험 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어찌어찌 비밀조직 ‘UNITY’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주어진 임무라고는 자료정리 같은 사무업무 정도다. 왜 여자에게는 현장에서 뛸 기회를 안 주냐며 펄펄 뛰던 케이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남자 스페셜 에이전트가 전부 살해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세계 정복을 노리는 비밀단체 ‘HARM’과 맞서 싸울 사람은 본드걸밖에 남지 않았다. 현장에 파견되는 이유가 조금 불쾌하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케이트는 세계 평화와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권총을 들고 달려간다. ‘폭스 인터랙티브’에서 만든 <노 원 리브즈 포에버>는 60년대 스파이영화의 분위기를 살린 독특한 일인칭 슈팅 게임이다. 일명 ‘후까시’ 머리와 오드리 헵번 스타일 선글라스, 딱 붙는 알록달록한 옷에 로 웨이스트 벨트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스페셜 에이전트 케이트 아처는 똥배 하나 안 나온 패셔너블한 인물이다. <오스틴 파워>에 당장 출연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일인칭 슈팅 게임은 스토리가 약한 게 보통인데, 이 게임에서는 방대한 이벤트가 영화처럼 연출된다. 하지만 묘하게도 잘 몰입되지 않는다.

게임은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주인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주인공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다. 게이머는 케이트 아처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시선으로 게임을 체험하고 행동한다. 반면 이벤트 장면에서는 삼인칭으로 전환된다. 영화를 보듯 펼쳐지는 화면에서 그녀의 개성에 매료되다가도 게임 플레이에서 일인칭으로 돌아가면 몰입이 깨져버린다. 남자인 나로서는 일인칭과 삼인칭 사이의 괴리에 적응하기 힘들다. 어색하고 불편하다. 여성 게임인구가 적은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99%의 게임이 노골적인 남성의 논리에 의해서 지배되고있으니.

이 게임에서는 여성이 눈요기가 아니라 당당한 주인공이다. 케이트 아처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행동하는 주체다. 그녀는 게임을 지배한다. 생각하고 결정하고 움직인다. <노 원 리브즈 포에버>에는 스파이영화처럼 분위기를 깨는 불필요한 노출신이나 베드신이 없다. 케이트는 게임 속에서 가장 자아가 뚜렷하고 적극적인 존재다. 물론 총도 제일 잘 쏜다. 여자가 무슨 현장 일이냐고 툭하면 난리인 낡고 고루한 상관을 놀려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