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은 문화적으로 ‘쿨’할까. 이 질문은 최근 이 지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에 대한 나의 시각이다. 즉, 어떤 사상이 문화적으로 멋지고 세련되었을까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달리 말해 사회주의든, 페미니즘이든, 혹은 다른 ‘주의’나 ‘이즘’이든 거대 담론에 대한 일반인(나를 포함한)의 반응이 ‘실제로 그렇다’고 판단한다. 험악하고 살벌한 논쟁에 빠져서 이전투구하고 싶지 않은 심정은 부차적일 뿐이다.
먼저 사회주의. 오늘날 사회주의자는 ‘쿨’한 존재일까. 그런 시기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냉전시대 반공 이데올로기의 최후 보루인 한반도 남쪽에서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지혜와 용기를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었다. 흔하지는 않았지만 두개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들이 존재했고 오늘날 이렇게 상업적 주간지의 고급 종이 위에서 사회주의를 운운할 수 있게 된 데는 그들의 공이 크다.
하지만 ‘구(舊)사회주의자들’이 멋진 존재였던 것은 그들이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투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무장’했던 ‘투사’들 중에는 지금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사람까지 포함되니 그건 개뿔도 뭣도 아니다. 이들을 멋진 존재로 만든 것은, 인간에 대한 배려, 세상에 대한 관심, 평등에 대한 갈망 같은 윤리적 지향이었다. 신영복이나 홍세화 같은 유명인은 물론이고 전우익 같은 무명인의 글이 짙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는 이런 에토스(ethos), 즉 윤리적 이유가 우선적이다. 지배적 도덕과 규범을 거스르면서도 부도덕하지는 않고, 원칙이 확고하면서도 꽉 막힌 ‘꼰대’ 같지는 않은 윤리를 통해 이들은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들이 누구누구를 ‘솎아내자’고 말한 적이 없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 뒤에 등장하여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인물들은 무언가 한면이 부족해 보인다. 한편으로는 지혜가 아닌 지식과 이론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형이 탄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과 이론은 쓸모없는 것이며 ‘악으로 깡으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유형도 탄생했다.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경우도 있지만 두 유형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 사회주의’는 둘 중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 1990년대 말에 등장한 그 사회주의자들 역시 날로 지리멸렬해지는 우리네 비루한 삶에 윤리적 지침을 제공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고독하게 싸우는 그들의 에토스는 따지고 보면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대안이 혼미한 상태에서 잊혀져가는 기억들을 환기시켜주는 효과를 가졌던 것은 틀림없다. 특히나 (사회주의를) 청산하거나 (사회주의로부터) 전향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그 사회주의는 더욱 멋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사회주의는 이제 ‘씹기’와 ‘까대기’와 ‘악다구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날이 갈수록 구사회주의자의 멋진 윤리를 찾아보기는 힘들어지고, 그렇다고 시대의 변화에 맞춘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이런 의심조차 든다. 그동안 그 사회주의에 대해 보낸 관심과 애정의 실체는 혹시 10대 대중가요 팬이 대중스타에게 열광하는 것이나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라는 의심…, 만약 그렇다면 그 사회주의 역시 지극히 ‘1990년대적’인 현상이다. 물론 이건 미래의 역사가 판명해줄 문제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당신의 주장은 무엇이냐고? 상업잡지에 잡문이나 쓰는 주제라서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건 미래에 대한 대안을 과거에서 찾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회주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 신현준/ 전(前) 사회이론가 http://homey.wo.to
P.S.
1. 지면 관계상 ‘그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는 미루겠습니다.
2. 이 글을 ‘사회주의 비판=자본주의 찬양’으로 오독하는 것을 금합니다.
3. ‘윤리’와 쿨’ 등의 단어는 세간의 용법과 다소 상이하다는 점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