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란 묘한 장르다. 보는 사람들은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고, 조금만 자료를 뒤져보면굵직굵직한 사건마다의 승자와 패자 또한 쉽게 알 수 있다. 등장인물 자체가 스포일러라는 농담은 그래서 나온다. 과거의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가상의 인물들이 한복을 입고 나오는 퓨전사극,혹은 역사적 사실을 조합해 흥미로운 가설을 만들어내는 팩션사극은 좀 다르지만 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정통사극’의 길은 운신의 폭이 좁은 만큼 험난하다. 까다로운 고증을 거치며 역사왜곡을 피해가면서도 지루해선 안 된다. 세상과 드라마 시장과 시청자의 기호는 빠르게 변해가지만 사극이 활용할 수 있는 재료는 과거의 그 시대에 멈춰 있다. 결국 과제는 더욱 까다로워진다. 어떻게 동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
KBS <정도전>은 모처럼 묵직한 무게감과 이야기의 재미를 동시에 갖추고 나온 대하사극이다. 국사 시간에는 “태정태세 문단세”를, 국어시간에는 <하여가>와 <단심가>를 외우느라 바빠 정작 이토록 흥미로운 격변기인 줄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던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역사가 조선의 기틀을 닦은 남자 정도전(조재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MBC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이 그랬듯, 주인공에게 가장 큰 시련을 주면서 그의 정치 감각을 단련시키고 신념을 굳게 만드는 정적 이인임(박영규)은 정도전 이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다. 고려 권문세족을 대표하며 공민왕(김명수)과 그의 아들 우왕(박진우)을 좌지우지한 그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노회한 정치가로서 정도전의 이상(理想)을 가로막는다. 난세를 틈타 권력과 재물을 축적하는 그가 전략 하나 없이 정공법으로 세상과 부딪히는 정도전을 향해 “고작 당신 정도가 떼를 쓴다고 바뀔 세상이면 난세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라고 충고하는 아이러니는 의외의 설득력마저 갖는다. 중국의 분열과 고려 정세의 관계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군사를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보급선을 압박하는 등 그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뛰어난 정치 감각의 묘사가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의 정현민 작가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그런 이인임과 맞서고 필요에 따라 손을 잡거나 무릎을 꿇는 이성계, 최영 등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와 그들이 대표하는 세력의 이해관계는 <정도전>을 팽팽한 긴장감의 정치사극으로 만드는 각각의 축이다.
그래서 오로지 왕가의 혈통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오른, 어리석거나 광기 어린 왕을 모시며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알았던 신하 정도전이 현실의 부조리와 백성의 고통을 몸소 겪은 끝에 마침내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로 결심하기까지의 십수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라는 맹자의 말은 지금도 정치인들의 흔한 립 서비스로 쓰이곤 하지만, 공민왕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백성의 중요성을 설파하던 정도전이 결국 <맹자>를 불태우며 백성을 위해 ‘500년 묵은 괴물’ 고려를 죽일 것을 다짐하는 순간은 한 인간에게나 역사적으로나 의미 있는 각성이다. 어떤 사극은 역사를 재현하는 데 그치고, 어떤 사극은 그를 넘어 역사의 행간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정도전>은 후자다.
+ α
이인임의 명대사를 찾아라!
“의혹은 궁금할 때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감당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네.” “정치하는 사람의 칼은 칼집이 아니라 웃음 속에 숨기는 것이오” 등 이인임의 수많은 명대사 가운데 강렬하게 귀여운 한마디는 공민왕으로부터 버림받은 뒤에 나왔다. “소신, 권세는 탐했을지언정 전하의 충직한 개로 살아왔거늘, 이건 너무 심한 처사 아니옵니까!” ‘권세’는 탐했다니, 수시중 나리는 솔직하시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