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trans x cross
[TRANS X CROSS] 물끄러미의 산책자,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 펴낸 정기현 소설가
이유채 사진 오계옥 2025-09-01

형광 초록색의 소설책을 본 적 있나. 제목보다 훨씬 큰 책가방이 자리 잡은 표지, 책등을 가득 채우는 큼지막한 제목은? 수상하고 비범해 궁금증을 자아내는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정기현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는 동네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전문 산책자가 나타나 동행을 자처한다. 이따금 멈춰 서서 눈에 띄는 낙서를, 비밀스러운 공터를, 어쩐지 슬퍼 보이는 사람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관찰하는 산책자는 그처럼 골똘히 응시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정기현 작가는 2023년 문학 웹진 <림>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신예다. 올해로 10년차 민음사 한국문학팀 편집자이기도 한 그는 반차를 내고 <씨네21>의 초대에 응했다. 오는 길 위에서 그가 무엇을 눈에 담았을지 궁금해하며 그의 첫 책을 펼쳤다.

- 수록된 단편 8편은 새미, 기은, 승주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끈다. 작품에 따라 새미는 실종됐다가 소인(小人)이 되기도 하고, 10대 소녀로 등장하기도 한다. 기은은 모두 성인으로, 승주는 직장인이었다가 전교 1등하는 중3으로 나온다. 세 인물을 반복적으로 변주해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소설의 아이디어가 동네를 걷거나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떠오른다. 같은 공간과 방 식에서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니 등장인물들이 서로 엮여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연결해서 읽는 재미도 있고.

- 인물들이 이른바 ‘파워 J형’이다. 소인을 돌보는 임승섭(<발밑의 일>)은 매일 네 시간씩 도서 검수 작업을 하고 귀가하고, 어린 새미의 할머니(<검은 강에 둥실>)는 잠들 때까지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모범생 승주는 남자 친구 범규(<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와 순서에 맞춰 휴식 시간을 보낸다. 규칙적인 인간에 유독 끌리나, 아니면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반영된 걸까.

둘 다다. 편집자로서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마감해야 하다 보니 늘 스케줄러를 구체적으로 쓴다. 자기만의 루틴이 있는 사람을 재밌어한다. 이들은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걸 진지하게 지키는데 거기서 오는 차이가 흥미롭다. 루틴이든 징크스든 살짝만 깨져도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좋은 소설적 재료가 된다.

- 가장 흥미로운 점은 비인간 존재가 등장했을 때 인간이 그들을 혐오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점이다. 소인, 말하는 멧돼지와 뻐꾸기, 까마귀 등과 인간의 만남이 자연스럽다. 지구가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작가의 인식이 스민 결과라고 짐작했다.

평소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내가 모르는 삶이 너무 많으니까. 도시 한복판에 폭우가 쏟아져 버섯이 엄청나게 자랐다는 해외 토픽을 읽었을 때도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강의 둥실>의 멧돼지 장면과 관련이 있는데, 어릴 적 친척 어른들이 선산에 모신 가족을 파먹으러 오는 멧돼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어른들이 곧바로 수습할 방법을 논의하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바로 다음 할 일을 도모해야 하는 거구나. 지금도 그 생각을 한다.

- 주요 소설적 공간을 교회, 도로, 공원, 재건축 아파트 등 오래되고 누구나 드나드는 곳을 선택했다.

구도심을 좋아하는데 그게 본능적인 끌림인지 아니면 구도심에서만 살아 버릇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서울 송파구의 거여동에 6년 정도 살았다. 이 동네가 재밌는 게 아직도 프랜차이즈가 별로 없고 옛날부터 버텨온 개인 가게가 꽤 된다. 자잘한 소문들이 떠돌고 근처 마천쪽으로 가면 황량한 벌판과 공사판이 펼쳐진다. <농부의 피> 속 승주가 가꾸는 텃밭은 실제로 주민들이 작은 언덕을 구획 지어 텃밭을 가꾸던 모습에서 가져왔다. 비밀스런 풍경의 동네를 걷다 보면 상상이 절로 일어난다. 신축 아파트가 세워진 곳에 가면 ‘참 크구나’에서 그치는 데 말이다.

- 소설집이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산책과 걷기는 기본, 테니스, 탁구, 농구 등의 각종 스포츠와 뛰어오르거나 하늘을 날기까지 다양한 움직임이 이야기 곳곳에 스며있다.

운동 경기 보는 걸 좋아한다. 하는 것도 좋아해서 이것저것 참 많이도 도전했다. 한달뿐이었지만 자전거도 타고 복싱도 배웠다. 테니스 대회가 열릴 때마다 보러 가던 시절이 있었고 실제로 치기도 했다. 지금 정착한 건 탁구다. 중학생 때 이후로 지난해 1년간 배운 뒤 꾸준히 하고 있다. 이번 주말엔 대련 약속이 잡혀 있고. (웃음) 운동선수들이 용기주는 말을 많이 해 문구를 기록해두고 종종 꺼내 본다.

- 한편 음울한 여운이 길게 남기도 한다. 그 이유를 찾다 보니 작품마다 죽음을 다루고 있더라. 사람이 죽거나 처형될 위기에 있거나 백골이 발견되기도 한다. 살인미수 범죄와 같은 장난이 나오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능력은 결국 이 세계에서는 사라진다는 점과 맞닿아 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 장례식 장면이 많은데 내가 실제로 작은 교회를 다니던 시절, 한달에 한번꼴로 장례식에 참석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죽음은 바로 옆에 있고 어쩌면 엄청 대단한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강하게 인식하면서 죽음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

- 왜 유독 슬픈 마음에 관심이 가는지에 대한 답은 찾았나.

슬픔은 어디에나 있고,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온종일 울게 하는 슬픔만이 아니더라도 영화 속 장면, 어떤 풍경에서 스쳐 지나가는 슬픔도 그렇다. 슬픔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감정이자 태도다. 좋은 소설들에는 슬픔이 담겨 있기에 소설가는 슬픔을 볼 줄 알아야 한다.

- 한 사람에 대해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남는 건 슬픔 같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좀 슬퍼진다.

정말 그렇다. 신기하게 다들 힘들고… 너무 슬프다.

- 소설 쓰는 시간은 어떻게 마련하나.

평일에는 회사 갔다 오는 것만으로도 너무 피곤하다. (웃음) 일단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좀 쓴다. 그리고 다시 잤다가 출근한다. 주말에 몰아서 쓰고. 회사 생활과 소설 작업을 병행하는 게 초반이라 그런지 아직은 재밌다.

- 창작자로서 요즘 관심 가는 사회적 이슈나 인생의 화두에 대해 들려 준다면.

취미로 양봉을 한 지 2년쯤 됐다. 도시 양봉을 배웠고 주말 새벽이면 대전에 만들어둔 작은 양봉 터로 향한다. 잠깐 갔다 오기만 해도 퍽퍽하고 무정한 도시 느낌이 해소된다. 양봉이 들어와야 내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걸 이젠 안다. 요즘은 농촌에서 좋은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실제 생활에서든 소설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