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가 사랑, 예술, 삶, 죽음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 예술, 삶, 죽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이것이 니키 리, 임지은 작가가 <애정 행각>에서 나누는 대화의 화두다. 늘 급하고 심플하며 자신이 타고난 예술가임을 아는 니키 리, 늘 머뭇거리고 복잡하며 자신이 타고난 예술가는 아니라고 확신하는 임지은. 정반대의 두 사람은 7년 넘게 친구 사이로 지내며 난장에 가까운 토론을 펼치길 좋아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대화를 일부 기록한 책이 바로 <애정 행각>이다. <연중무휴의 사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 등 에세이스트로서 활보 중인 임지은 작가의 솔직하면서도 섬세한 문장이 이들의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다. 사진, 영상, 미술을 횡단하는 예술가의 삶에 이어 이제는 ‘비트닉’의 대표로 매니지먼트 사업에도 발을 들인 니키 리는 그런 임지은의 섬세함을 질색하면서도 깊이 사랑한다. 지독한 관계다.
- 책의 서문에선 임지은 작가가 두 사람의 첫 만남을 회고했다. 갑자기 니키 리에게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고,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다.
니키리 SNS를 통해 다양한 분들의 글을 자주 찾아보는 편이다. 글을 쭉 읽다 보면 ‘아, 이 사람하고 내가 결이 맞겠구나. 아니면 나랑 맞지 않더라도 이 사람의 사고 구조나 논리가 흥미롭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주저 없이 메시지를 보내서 “차 한잔 하실래요?”라고 말한다. (웃음) 언제는 마음에 드는 글을 쓴 사람과 친구가 되어서 그 글을 소재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지은이도 마찬가지였다.
- 책의 내용을 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정반대다. 니키 리는 심플하고 현재를 살며, 임지은은 복잡하고 과거를 산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연이 쭉 이어진 게 흥미롭다.
니키리 인간관계에 성격이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친구도 연인도 심지어 배우자도 성격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나와 재밌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인지다. 대화가 재밌으려면 상대의 사고가 재밌어야 하고, 사고는 그 사람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좋은 친구들을 계속 얻는 중이다. 확실한 루트다.
- 코로나19 팬데믹 전에 만나서 이제 7년차 친구가 됐다. 몰랐던 서로의 모습이나 변화를 감지했을 법도 한데.
임지은 니키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늘 어떤 변화를 좇으면서 산다는 점에선 전혀 변화가 없다. (웃음)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니키의 모습을 ‘발견’하며 만나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니키는 예술가로서 알려진 사실이 너무 많은 사람이고 과거의 많은 이력이 공개된 유명인이다. 그런데 니키는 그런 과거에 전혀 연연하지 않고 과거와 다른 현재의 자신을 해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나는 늘 내가 지닌 과거와 현재 사이의 틈을 설명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니키는 정반대다. 항상 지금을 사니까.
니키리 그렇다고 내가 막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텐션 높게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건 아니다. 거의 방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다. (웃음) 대신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거다. 생각. 생각.
- ‘발견’이라는 단어가 재밌다. 니키 리의 어떤 모습을 발견했을까.
임지은 니키는 자신의 의견이 강한 편이고 겉으로 보기에도 스타카토처럼 단단하고 딱 떨어지는 성격이다. 그런데 사실은 나보다도 더 연약하고, 친구 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기도 하더라. 종종 그런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재밌다.
니키리 연약하다기보단 섬세한 거라고 해줘야지!
임지은 그래. 섬세한 아기.
- 책에서 말했듯 니키 리는 어떤 복잡한 문제든 간단하고 명료한 대답을 내는 사람이다. 내심 섬세 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간결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니키리 어떤 사람이 모든 문제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겠나. 대신 난 유학 생활이든 작업이든 많은 경험들을 해봤다. 가지고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100살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웬만해서는 그 용량 안에서 바로 답변이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섬세한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이나 마음의 주름을 모르는 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한다. 그 섬세함의 주름을 잘 펼쳐놓은 게 문학이기도 하니 글 읽는 것도 좋아하고. 지은이를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은이의 섬세함을 사랑하는 거지.
임지은 만약 내게 어떤 주름이 있으면 난 한참을 머뭇거리는데, 니키는 그게 뭔지 딱 알고 무언가 결정을 내버린다. 솔직히 그런 니키의 모습에 분명 짜증이 날 때도 있다. 니키도 답답한 나한테 짜증을 내고. (웃음) 그런데 굉장히 모순적인 점이 있다. 니키는 내 주름에 짜증을 내는 동시에 그 주름을 아주 좋아해준다. 니키는 상대가 자의식 없이 자기 말에 맞장구만 치는 일에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이다. 나는 겉으론 주눅 들면서도 사실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 고. 그래서 대화가 이어지는 것 아닐까.
- 그런 두 사람의 관계성이 가장 잘 드러난 내용이 있다. 니키 리가 자신의 첫 페인팅 작품을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여줬는데, 임지은 작가가 “조악하다”라고 악평을 보낸 부분이다.
임지은 아…. 그때 진짜 얼마나 졸았는지. 전자시계에서 내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도 다 알았을 거다. 다만 더 열받는 건 니키한테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조금씩 설득당한다는 거다. 다시 보니까 ‘어… 좀 괜찮네?’ 싶을 때이상한 마음이 든다.
니키리 너, 우리 표지 그림은 좋다고 했잖아(<애정 행각>의 표지엔 니키 리의 회화 작품이 실려 있다.-편집자). 왜 그런 얘기는 빼먹고 싫다는 얘기만 해.
임지은 그래 저건 처음부터 좋다고 했잖아! 근데 ‘내가 니키한테 홀렸나?’라는 생각이 들 땐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거지. 난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 아주 많은 절차가 필요한 사람이다. 특정 작품에 대해 딱 감각적으로 좋다, 아니다를 느끼지 못하는 성질에 대해 일종의 결핍을 느끼기도 한다. 한편으론 그렇게 직관적으로 좋다고 느끼지 못한 작품이 외려 나를 몰두하게 만들기도 한다. ‘니키는 저게 좋다는데 왜 나는 그걸 못 느끼지?’라는 생각이 들면 그 마음을 글로 적으면서 풀어 보거나, 그때의 감각을 떠올려보는 거다. 이를 테면 니키의 첫 작품을 봤을 때는 정자동 아파트에서 한여름의 매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다시 떠올리면서 그때의 감각을 최대한 되살려보기도 했다.
니키리 이게 어쩔 수 없는 문학 소녀들이라니까. 난 그날에 내가 뭐했는지 아무 기억도 안나. (웃음)
임지은 난 너무 생생히 기억나! 난 이런 식으로 내 심장이 쫄깃하거나 이해 안 가는 순간이 있을 때 세상을 인식하는 날이 선다. 그래서 니키와의 대화나 니키의 그림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얘기하다 보면 감각이 곤두서고 뭔가가 마음이 맺히는 기분이 드니까.
니키리 네가 당한 그런 걸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가스라이팅.’
- 두 사람이 예술에 대해 논쟁하는 부분들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중 ‘예술가는 엄청 조급한 사람들’이라고 정의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임지은 예술가인 니키는 정말 웬만해서 어떤 일도 미루질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처리한다. 그런데 딱 한번, 처음 페인팅에 도전했을 때 엄청나게 망설였다.
니키리 오죽하면 내가 미루고 미루다가 너무 답답해서 다리를 부러뜨렸겠니. 그냥 바깥에 확 나가 하키장에 갔더니 다리가 딱 부러진 거지. 물론 일부러 부러뜨린 건 아니다. 다친 순간에 딱 ‘아, 이게 내 분기점이겠구나’라고 하면서 사후적인 의미를 붙인 거다. 영화로 치면 얼굴 클로즈업이 쓱 들어가면서 다친 애가 환히 웃고 있는 모양새랄까.
임지은 난 그냥 무조건 미룬다. 어쨌든 최대한 미룬다.
니키리 아니, 작가들은 마감에 맞춰서 글을 쓰는 걸 본 적이 없어 정말.
임지은 항상 하는 말인데 글쓰기의 가장 효율적인 신소재 연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그 연료에 기대지 않으면 절대 글을 안 쓰는 게작가들 같다. (웃음)
- 책이 나온 뒤 반응은 어땠나.
니키리 지은이의 마음에 따라 책을 읽었다는 사람들이 많더라. 지금 시대를 사는 밀레니엄들의 성향이나 정서가 지은이랑 비슷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임지은 나는 반대로 독자들이 니키의 모습을 굉장히 욕망하기를 바랐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니키가 의미화되고 대상화되길 바랐다. 평소에 글을 쓰는 목적도 비슷하다. 독자들에게 어떤 상황, 대상, 감정을 강하게 욕망하게 만드는 거지.
니키리 얘야, 책에서 나를 그렇게 이기적이고 심지어 ‘입체적으로 못돼먹은 여자’라고까지 썼는데 독자들이 나를 욕망하겠니?
임지은 에이. 사람들의 욕망이란 건 자신의 ‘없음’과도 다름없다. 니키라는 예술가, 사람의 태도와 더불어 니키의 사고방식, 삶의 방식은 아주 희소한 예술가의 성정이다. 나도 그런 니키를 보면서 나의 ‘없음’을 상기하고 그걸 삶의 활력으로 삼기도 하는 편이다.
니키리 그래. 내가 욕망의 화신이 돼서 훨훨 날아가줄게.
- 본문 중 ‘다정함’에 대한 논의에서 그런 니키 리의 특징이 잘 드러났던 것 같다. 근래에 유행하는 듯한 ‘말뿐인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였다. 임지은 작가는 제로 콜라에 빗대 ‘제로 다정’의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임지은 언어라는 것도 결국 그것에 대한 감각을 겪지 않으면 쓸모없는 수단이라고 생각한 다. 그런데 니키는 그런 언어의 감각이나 삶의 실감을 너무 잘 느끼고 잘 전해주는 사람이다. 책에 나오는 대로 니키의 다정함은 늘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에 가깝다.
니키리 말을 잘 안 믿는다. 상대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다정함은 실감으로 다가와야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다정’이라는 것에 언어라는 껍데기만 남았단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껍데기만 보여주는 사람은 끝까지 괴롭히려고 한다. ‘그래 계속 그렇게 기표만 던져 봐. 언제까지 가나 보자. 계속 얘기해보자.’ 이렇게. (웃음)
- 두 사람의 대화를 종합하면 두 작가가 ‘극한의 실천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제목 <애정 행각>에도 드러난 부분이다. 애정은 관념에 가까운 데, 그것을 ‘행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니까.
니키리 그래. 다정도 행각을 해야 하는 거다. 다정 행각!
임지은 그렇게 늘 실천하는 니키의 모습은 내게 너무 중요한 글감이다. 나중에 니키의 위인전도 내가 써야지. 아, 근데 위인은 좀 그렇고 내가 쓴 자서전 어때?
니키리 아니? 위인이 더 좋은데? 그래, 좋다. 위인이 돼야겠어.
임지은 그래. (웃음) 내가 니키라는 글감을 먹기 위해 호시탐탐 옆에 있겠어. 계속 더 많이 무언가를 하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