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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슬픔의 자리에 능청을 - 일곱 번째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을 펴낸 윤성희 소설가
이유채 사진 오계옥 2025-04-21

윤성희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윤성희 동네’의 지도를 쉽게 그릴 수 있다. 오래된 친구들이 찌개에 소주잔을 부딪치는 이름 없는 한식당, 간이 테이블에서 가족들이 캔맥주를 나눠 먹는 편의점, 여고생들이 즉석 떡볶이를 기다리는 분식집, 노인들이 산책 중인 공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몸을 푸는 학교. 망한 세탁소와 슈퍼와 문방구. 도로에는 삼촌의 만물상 트럭이 씽씽, 길가에는 어린이들이 와다다다. 그리고 이젠 없는 소중한 존재와 꿈에서 만나기 위해 잠을 청하는 누군가와 그를 몰래 찾아와 재우려는 영혼이 사는 집까지. 윤성희 작가는 1999년 데뷔 이래 꾸준히 애틋하고 소박한 자기만의 동네를 만들어왔다. 애써서 살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을 오래 바라보며 그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올해 3월에 출간된 윤성희의 일곱 번째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의 테마는 생일이다. 생일 맞은 사람들로 가득한 단편들은 인물들에게 웃는 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바람이 담겨 온기로 그득하다. 창간 기념일이 있는 4월 동안 생일 파티를 이어가고 있는 <씨네21>은 생일 책을 낸 윤성희 소설가에게 함께 기뻐하자는 초대장을 보냈다. 기꺼이 응해준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소설 창작을 가르치고 있는 서울예술대학교를 찾았다. 도착한 기자를 향해 한 사람이 멀리서부터 걸어왔다. 환한 미소에서 그가 윤성희 동네의 주인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쓴 단편 여덟편을 모았다.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날마다 만우절>이라는 소설집을 냈고, 내가 너무 시대를 읽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던 때였다. 이 당시 한창이던 코로나19 팬데믹도, 이전의 사회적 참사들도 소설에 담아내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했는데 결국 잘 안됐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그냥 내가 잘하는 걸 하자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기질이 그런 것 같다. 일상을 산책하는 이야기,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소시민 이야기 안에서만 상상이 되고 잘 써진다.

-그렇다면 윤성희 소설에 그 흔한 회사원도 잘 없고, 작가와 같은 중년 여성이나 교수가 보이지 않는 건 그들을 두고서는 상상이 잘 안되는 걸까.

노동하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서 인물들을 어디론가 늘 출근시키지만 그들의 일터를 상상했을 때 어떤 빌딩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전문직의 세계를 잘 몰라서 그런가. 흥미롭지 않다. 교수는 내 직업이니 불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호기심이 안 생긴다. 왜 나는 또래 여성을 그리지 못할까 하는 궁금증은 오래도록 품어왔다.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할머니나 어린아이, 40·50대 남성을 화자로 삼을 때가 편하고, 써봐야지 하는 것들이 생긴다.

-진짜 생일인 사람(<타임캡슐>)과 생일인 척하는 사람(<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곧 생일이거나(<마법사들>), 생일인 사람을 챙기는 인물들(<자장가> <느리게 가는 마음> <웃는 돌> <보통의 속도>)까지. 모두가 생일을 거쳐 가는 <느리게 가는 마음>은 생일 테마집으로 부를 만하다. 작심하고 생일에 골몰한 결과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소설집 내 작품 중 시기상 처음인 <해피 버스데이>(2021)를 쓸 때 가짜 생일 이야기를 하는 게 재밌었다. 그러면 앞으로의 인물들에게는 생일을 줘볼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는데 다음해 작품들(<마법사들> <느리게 가는 마음>)에 자연스레 반영된 것 같다. <타임캡슐>(2023), <웃는 돌>(2023), <자장가>(2024), <보통의 속도> (2024)까지 작품이 웬만큼 모여 묶을 시기가 왔을 때에야 생일이 공통으로 들어간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쓴 <여름엔 참외>(2024)에만 의식하고 생일 관련 에피소드, 진짜 자기 생일을 알게 되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영화 내용을 넣어 전체 통일감을 살렸다.

-나든 누구든 생일이라고 하면 너그러워져서 좋다. 그리고 매일매일은 누군가의 생일일 텐데, 미역국을 먹거나 초를 부는 당사자의 얼굴을 상상하면 어쩐지 따뜻해진다. 인물들의 삶에 생일을 끼워넣은 건 소설 안팎으로 즐거운 에너지를 주고 싶어서일까.

단편은 대단한 스토리를 요구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저 인물을 작가가 계속 갖고 놀면서 이것저것을 붙여보는 거다. 최근에 얘는 언제 울었을까 웃었을까,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말이다. 최근 몇년간 주인공들에게 생일 파티를 열어주면서 좋았다. 소설 안에 여유와 부드러움, 리듬감도 생긴 것 같고 쓰는 동안 행복도 컸다. 소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흐름이 끊길 수 있으니 넣지 말라고 할 텐데, 내 소설이지 않나. 그리고 내 연차에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웃음) 완결성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웃고 기뻐하고 서로 기뻐해주는 순간을 보고 싶었다.

-“괜찮아, 그런 날도 있지”(<웃는 돌>), “지금처럼 잘하자. 지금까지 잘해왔다”(<느리게 가는 마음>) 같은 응원의 메시지도 같은 맥락에서 썼을까.

일부러 넣었는데, 언젠가부터 소설에서는 더더욱 희망만 말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어쩌면 내 방식대로 이 사회에서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한다는 게 뭘까. 더 나은 세계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책을 편 독자들을 생각하면 이 안에 좋은 말들을 가득 넣어주고 싶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무조건 나쁜 인간에게는 내 문장 한줄도 주기 싫어!” <마법사들>에도 나오는 “애쓴다”라는 말은 평소에도 좋아해서 넣었다. 우리 모두 힘겨운 삶을 애쓰면서 살고 있지 않나. 애쓰면서 사는 우리 모두에게 애쓰면서 계속 살자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평행봉 위에 있는 것처럼 걷기(<타임캡슐>),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바람 불어보거나 예쁜 구름 사진 찍기(<보통의 속도>) 등 힘들 때 써먹으면 좋은 것들도 많이 담겼다. 그래서 읽고 나서 종종 따라 해보면 힘이 난다.

누구나 삶이 아무리 바빠도 자기만의 여유 찾기 노하우가 있지 않나. 그 노하우를 실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 사랑스러워진다. 일상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이가 가진 삶의 태도이기도 하고. 그래서 내 인물들에게도 하나씩은 꼭 만들어주려고 한다. 등단하고 첫해부터 나를 한약방 서랍장이라고 상상해왔다. 산책하고 대중교통을 타는 동안 각종 노하우, 별명, 귀여운 단어, 각종 잡동사니가 떠오르는데 그걸 잽싸게 그 서랍장 안에 집어넣고 적절히 빼 쓰는 거다.

-그러고 보니 윤성희 소설에는 악역도 거의 없다. 이번 소설집에서 굳이 찾자면 친구 정원의 돈 3천만원을 가지고 사라진 영수(<여름엔 참외>) 정도가 아닐까. 그런 영수조차 나중에 만기를 앞둔 통장을 정원에게 건넨다.

갈등도 딱히 없다. 그건 내가 불편한 상황을 못 견디는 편이라서 그런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하고 싸우면 긴장감이 싫어서 무조건 먼저 잘못했다고 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갈등 천지인 회사 생활을 못 그리나. (웃음) 상실에 관한 얘기가 많은 것도 비슷한 맥락 같다. 죽으면 부딪힐 일이 없으니까.

-상실은 윤성희 소설의 또 다른 테마다. 엄마(<웃는 돌>)와 동생(<해피 버스데이>)과 같은 혈연은 물론, 주인공 친구의 아내(<해피 버스데이>)나 작명소 할아버지(<보통의 속도>) 같은 주변 인물들, 심지어 자신(<자장가>)까지 곳곳에 죽은 사람이 등장한다. 중요한 건 남겨진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애쓰며’ 살아가는 모습이 주가 되면서 이야기가 명랑한 기운을 잃지 않는다는 데 있다.

슬픈 장면을 쓸 땐 나도 마음이 좋지 않은데 그렇다고 막 힘들진 않다. ‘이건 이렇게 쓰면 안되지’ 싶은 문장을 고치는 데 더 정신이 쏠린다. 이중 <자장가>는 오열할 정도로 슬프게 읽었다는, 흔치 않은 독자 반응을 접해 내게 신기한 작품이다. 앤솔러지 <음악소설집>에서 청탁받은 거라 엄마의 꿈속에 들어간 죽은 딸아이가 엄마에게 아이유의 <무릎>을 불러주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여기서 아이는 ‘가까스로’ 꿈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러한 진입장벽은 내가 생각하는 소설론에 근거한 일종의 장치다. 결국은 주인공이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자장가>에서 아이가 부를 법한 노래를 찾다가 찾다가 K팝을 엄청 들었는데 그러다가 오마이걸의 팬이 됐다. ‘마냥 좋았던 그때 불꽃놀이’라는 가사도 소설에 넣었다. 그리고 이번주 토요일에 오마이걸 콘서트에 간다! 인생 첫 아이돌 콘서트라 살짝 떨린다. (웃음)

-일주일 내내 같은 꿈(<여름엔 참외>), 셋째 아이 태몽(<웃는 돌>), 콩 옮기기 대회에 나가는 꿈(<느리게 가는 마음>)까지 인물들이 별별 꿈도 참 많이 꾼다.

나는 꿈을 거의 안 꾸는 편인데 이상하게 내 인물들에게는 꿈을 꾸게 하고 싶다. 밥 먹고 걷고 술 먹고 꿈꾸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하나보다.

-인물들이 기억력이 좋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에피소드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예컨대 <보통의 속도>의 주인공은 유튜브에 몸살에 좋은 음식을 검색했다가 뭇국 끓이는 영상을 접하고 초등학생 때 매번 뭇국 맞춤법을 틀린 친구에 관한 일화를 들려준 뒤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지금 독특한 특징이 됐지만 데뷔 초반에는 이런 서술 방식을 고민하진 않았나.

초창기 이후, 내 스타일을 찾을 시기에는 글이 너무 어수선한 것 같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작법으로 수없이 잘하고 망하면서 내겐 이런 식의 물 흐르듯 흘러가는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내 안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주인공이 어쩌고저쩌고, 시시콜콜 자기 얘기를 떠드는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독자들에게도 좀더 부드럽게 읽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이런 작법의 백미는 <웃는 돌>에서 삼촌의 15년간 직업 변천사가 펼쳐지는 대목이다. 수산물 냉동창고에서 술집, 고깃집, 화훼 단지, 샌드위치 가게를 거쳐 현재 단체 티셔츠 맞춤 사업에 안착하는 과정이 마치 <기생충>의 ‘믿음의 벨트’ 대목처럼 휘몰아친다.

그게 내가 제일 잘하는 방법이다. 뭐냐하면 일단 빌드업의 마지막 문장을 뜻밖의 걸로 던져놓고 거기까지 한번 가보는 거다. <웃는 돌>의 그 대목은 ‘삼촌은 현재 티셔츠 가게를 한다’에서 시작했다. 이어나가는 과정이 재밌긴 했는데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 좀 고생했다.

-유튜버가 등장(<타임캡슐> <웃는 돌>)하거나 유튜브를 활용하는 장면(<보통의 속도>)이 전보다 꽤 많아진 것 같아 눈에 띄기도 했다.

내가 요새 유튜브를 많이 본다. 댓글도 함께 보는데 그중 잔잔한 노래 영상들에 달린 이런 댓글들에 눈이 간다. 내 딸이 죽고 얼마 뒤에 이 노래를 들었는데 좀 괜찮아졌어요. 악플도 선플도 아닌 슬픈 고백들. 그런 말들을 왜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남겨둘까. 그 마음이 궁금했고 지금 구상 중인 작품도 이 유튜브 댓글에 관련한 내용이다.

-과거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결국 미래를 향한다는 인상이다. “예순살이 될 때”까지(<자장가>), 관절 약을 서로 챙겨주면서(<여름엔 참외>) 살자고, 십년 뒤에 타임캡슐을 확인하러 오자고(<타입캡슐>), “한여름이 되면 아빠랑 엄마랑 똑같은 꽃무늬 잠옷 바지를 입고 수박을 먹”자고(<느리게 가는 마음>). 그렇게 오래오래 함께 살자는 굳건한 말들이 소설 곳곳에 심어져 있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한 독자라면 ‘주인공이 나중에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고 상상하지 않나. 나라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오늘 봄놀이를 가서 즐거웠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들이 내년에 봄놀이를 또 갔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쓴다. 주인공들에게 현재를 열심히 살게 해서 좋은 미래로 자연히 건너가게 하고 싶다. 애쓰는 사람들의 미래에 희망을 던져놓고 싶고 그게 내 소설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그런 소설을 쓰면서 나도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게 됐다. 쓰는 사람으로서 소설에게 고마운 일이다.

윤성희의 소설 쓰는 어느 하루

“마감을 앞두고서는 계획표를 따라 움직인다. 이를테면 오전 9시에 편안한 동네 카페에 가서 오후 1시까지 쓰고 나온다. 2시까지 점심을 먹고 2시 반까지 산책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2~3시간 동안 식탁과 소파를 오가며 쓰다가 다시 카페에 나와 1시간 쓰고 그런다. 쥐어짜서 쓰진 않는다. 그런 시기는 지났다. 아무 첫 문장이나 놓고 이어서 쓴다. 누구누구가 어제 수학 20점을 맞았다. 그냥 그렇게 시작하는 거다. 그러다보면 ‘재밌겠는데?’ 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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