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에서 10년, 차기작 <선택>으로 재기 꿈꾸는 홍기선 감독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데뷔작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찍은 92년에서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간 시간이다. 불운일까? 영화가
엔터테인먼트상품으로, 벤처산업의 유망주로 각광받게 된 그 세월 동안 홍기선 감독은 결코 두 번째 영화를 찍지 못했다. 외도를 하지도 않았다.
94년 동학 100주년 기념 미니시리즈 <새야 새야 파랑새야> 각본을 쓴 일은 있지만 새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가 머리를 떠난 적은 없었다.
지금 그가 붙잡고 있는 시나리오는 세계 최장기수로 알려진 김선명씨의 삶을 다룬 <선택>이라는 영화다. 97년 부산국제영화제 PPP에 처음
내놓은 <선택>은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 극영화제작지원작에 선정되면서 홍기선 감독을 설레게 했다. 10년 만에 얻은 기회라면 누군들 흥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니코리아에서 제작을 맡기로 했던 <선택>은 다시 암초에 부딪혔다. 영진위 투자분 외에 전액을 부담키로 한 제작사가 부분투자로
방향을 바꿨기 때문. 돌아보고 싶지 않은 누추하고 암울한 과거를 응시하는 <선택>은 다시 기로에 놓였다. 홍기선 감독이 두 번째 영화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그만의 것은 아니다. <가슴에…>를 지지했던 이들에게 <선택>은 지금 시대가 포용할 수 있는 영화의
범위를 보여준다. 과연 일확천금의 꿈에 젖은 2001년의 한국영화는 80년대가 낳은 리얼리즘의 유산을 외면하고 말 것인가?
치열했던 그 시절, 한복판에서
80년대 영화운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홍기선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얄라성, 서울영화집단, 장산곶매 등 그는 당시
영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무렵 젊은이들을 영화의 길로 이끈 게 진실의 힘이었음은 당연하다.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철저히 차단된 상황에서
영화가 억압적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그는 89년 장산곶매 대표로 80년 광주를 다룬 16mm 장편영화 <오 꿈의 나라>를
제작했고 이듬해 장산곶매를 나와 데뷔작을 준비했다. 원명희의 단편소설 <먹이사슬>이 원작인 <가슴에…>는 역설적이게도 대기업 자본의 영화계
진출과 맞물려 제작에 들어갔다. 비디오판권을 비롯해 제작비 절반 이상을 대기업에서 끌어온 이 영화는 홍기선이 제작, 연출, 각본을 모두
맡아 촬영에 들어갔다. 제작비 부족으로 93년 서울시내 2개 극장에서 조촐하게 간판을 올린 이 영화에서 그는 노예처럼 끌려간 새우잡이배
선원들을 그렸다. 어촌에 흘러들어온 한 젊은이가 악덕 선주를 만나 새우잡이배를 타게 되고 탈출을 도모하다 좌절하고마는 이야기를 통해 홍기선은
절망적인 세상을 보여준다. <가슴에…>는 기교면에서 뛰어난 편이 아니지만 시선의 솔직함이 세련되지 못한 형식을 압도하는 영화다. 진심이
담긴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다. 그가 이 영화를 찍던 92년은 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운동이 에너지를 잃어가던 때다.
홍기선은 <가슴에…>에서 그래도 세상은 변함없이 억압적이라고 말한다. 족쇄를 찬 듯 망망대해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새우잡이배의 작은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세상이 금방 바뀔 듯한 87년 6월항쟁에 관한 소식은 그러나 새우잡이배의 현실을 조금도 흔들지 못한다. 홍기선은 그렇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어떻게 한 인간이 45년을 버텼을까
<가슴에…>는 1993년 영평상 각본상, 신인감독상을 받고 평단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홍기선은 흥행영화를 기획하는 영화사와 타협하는
감독이 아니었다. 몇 차례 연출제의를 받았지만 자기색깔을 고집한 홍기선은 <가슴에…> 이후 딸을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보은, 진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했다. 그러나 “보은이에 대한 진관의 사랑을 그리려던” 그의 생각은 시나리오 완성단계까지 갔지만 진관이 영화화를 거부하면서
무산됐다. 94년부터는 알코올중독자의 이야기를 다룬 <술꾼의 노래>라는 영화를 준비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던 한 남자가 어느 순간
현실과의 긴장을 놓치고 알코올중독에 빠진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여러 가지 형태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졌지만 투자자를 만날 수 없었다. 96년엔
신경숙의 소설 <외딴 방>을 준비했지만 제작사 상황이 어려워져 역시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다. 95년 김선명씨가 석방되면서 관심을 갖다 97년에
시나리오를 쓴 <선택>은 감옥에서 보낸 45년 세월을 시대순으로 보여준다. 군사분계선에서 정찰임무를 수행하다 체포돼 특무대의 고문을 받는
순간부터 진행되는 이 영화는 현대사의 비극에 어떤 포장도 입히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한 인간이 45년을 감옥에서 버틸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직접 김선명씨를 만나 취재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연로한 탓에 2시간쯤 얘기하면 피곤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과거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기선은 “나 같으면 쉽게 한장 써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견뎌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념이나 신념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자기와의 약속이며 같이 감옥에 있던 동지에 대한 사랑이며 강압적
상황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를 영웅화하는 게 아니라 세계 어디도 그렇지 않은데 우리만 아직 이념의 사슬에 매어 있는 상황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모두가 돌려서 얘기하는 영화만 하잖나”
분단문제를 다룬 <공동경비구역 JSA>가 최고흥행기록을 경신하는 시대가 됐지만 <선택>의 제작여건은 좋은 편이 못된다. 미스터리와 코미디라는
장르영화의 틀을 빌린 <공동경비구역 JSA>와 달리 정공법을 택한 영화라는 게 투자자를 쉽게 끌어들이지 못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홍기선은
돌려서 얘기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모두가 돌려서 얘기하는 영화만 하지 않는가”라는 그의 반문은 홍기선의 미학이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을 암시한다.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비판이 어떤 것들인지 안다. “시대착오적인 거 아닌가”, “답답하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
하는 주위의 반응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실을 다른 영화적 장치를 통해 표현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지만 순수하게 그리는
작품도 필요하지 않은가. 보기 싫은 우리 사회의 결점도 솔직히 드러내고 반성하고 그래야 발전하는 게 아닌가.” 영화에 대한 그의 이런 생각은
확실히 지금 한국영화에 부족한 어떤 면을 드러낸다. <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열린책 펴냄)에서 영화평론가 이효인씨는 홍기선에 대해 “그는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묘사하고 있다. 과장하지 않고 엄살떨지 않고 기교부리지 않으면서도 정말 깊이깊이 삶을 바라보고 세상의
동력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진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재의 무거움이나 진지함을 피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경박한 영화들이 지나치게
많은 최근 상황에 비춰보면 결코 단점이 아니다. <박하사탕>에 쏟아진 찬사에서 보이듯 그간 관객이 갈증을 느낀 것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재미만은 아니었다. <가슴에….>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 조재현씨는 홍기선에 대해 “주류 한국영화와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꼭 살아남아야 할
감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번번이 촬영 전 단계에서 눈물을 삼켜야했던 불운한 감독을 동정하는 말이 아니다. 홍기선의 재기가 한국영화가
어렵게 지켜온 리얼리즘 전통의 생존과 관련돼 있다는 걸, 그를 아는 사람들은 믿고 있다.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 <선택>은 어떤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