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주관적인 감상문을 써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날 나는 신이 났었다. “필(feel)이 팍 꽂히네요”라며 큰소리를 치고는 영화를 재미나게 본 뒤 컴퓨터 앞에 앉았다. (….
무거운 침묵중.) 할말은 무지하게 많은데 마치 취객의 걸음걸이가 꼬이는 것처럼 머리 속과 손가락이 꼬였다. 쉬 마려운 강아지마냥 오락가락하며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아프다고 투덜거리기도 하다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오래도록 창 밖을 쳐다보았다. 하늘 위에서 홀연히 생각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길들여져 있었구나….” 나는 ‘비평가’로서 글을 쓰기 위해, 길들여질 만큼 오래도록 애써왔던 것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환경, 자세, 준비물(나는 작은 수첩과 형광불빛이 나오는 볼펜을 휴대한다), 태도와 보는 각도 등을 일정한 패턴에 따라 자동으로 ‘스탠바이’시킨다.
여기서 꼬리를 문 생각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영화의 첫머리에서 LP레코드가 올려지고 난 뒤, 열한살짜리 빌리는 제자리에서 팡팡 뛰어오르며 온몸의 에너지를 춤으로 쏟아낸다. 내가 중학생이던
언젠가 소풍을 갔을 때, 반별로 빙 둘러서서 춤을 추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지금 보기에는 어색한 일이지만, 영화 <박하사탕>에 묘사되어
있듯이 소풍이나 야유회 등이 질서로부터 가볍게 일탈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되던 시절이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나무 뒤에 주저앉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얼마쯤 뒤에 담임 선생님의 신발 한짝이 날아왔고, 우리 반의 여흥은 그걸로 끝이었다.
빌리의 아버지는 권투도장에 간 빌리가 글러브 대신 분홍색 발레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보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 된다. 그가 보기에 남자의
육체는 광산에서 석탄을 캐거나 파업에 참여해서 경찰을 두들겨팰 수는 있어도, 여자아이들 틈에 끼어 춤을 추도록 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아니, 그에 앞서 육체란 노동이나 정치를 위한 것이지 감각과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며, 천상에 이르는 통로는 이성이지 육체는 아니었을 것이다.
소풍을 간 열서너살 무렵의 내 영혼은 어떻게 해서 빌리 아버지의 가치체계가 그토록 삼엄하게 지배하고 있었을까.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가정과 학교로부터 세상이 얼마나 위태로운지에 대해 경고를 받으며 자랐고 심지어 내가 마음속으로 따르던 선생님께서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남자는 도둑놈”이라는 살벌한 교훈을 칠판에다 또박또박 적어주신 적도 있었다. 여고생이던 어느 날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기억할 수 없는 월간지에서
혼전순결을 깨뜨린 한 여성의 ‘체험 수기’를 읽게 되었는데, 그녀가 진실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더럽혀진 육체가 한스러워
‘이태리 타올’로 피부가 부르트도록 박박 밀었다는 내용으로 끝이 났다. 그때 이후로 여성인 나의 육체가 공포스러워졌다.
빌리 아버지가 빌리라는 남자의 육체를 통제하려했던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그러나 훨씬 파시스트적으로 여성의 육체는 통제된다. 세월과 함께
달라진 부분도 많지만, 이같은 기본 논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켜켜이 쌓여 있고 사회적 관습과 제도, 법률에 거미줄처럼 반영되어 있다. 얼마
전 TV에서는 이혼녀가 총각과 결혼하면서 벌어지는 평지풍파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를 모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나의 머리 속에 내면화되어
‘보이지 않는 눈’으로 매일매일의 나를 감시하고 있음을 느낀다. 한때는 맹종했고(반역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죄악이자 수치였으므로),
지금은 순종과 반역과 타협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산다. <빌리 엘리어트>가 주는 감동 가운데 하나는 빌리의 아버지가 자신의 몸에 수십년간
배어 있던 믿음의 체계를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깨부수었다는 사실에서 온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히 깨어져야 할 고집이고 또 깨어지는
걸 보여주는 게 영화이지만, 세상의 수많은 빌리와 낸시, 철수와 영희, 그들의 부모와 학교, 종교와 미디어가 항상 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처럼
행복하고 지혜로운 결말을 맺지는 않는다. 깨어지고 난 다음의 아름다움이여! 감독은 그것을 성인이 된 빌리가 <백조의 호수> 음악에 맞추어
무대 위를 도약하는 단 하나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압축했다. 이 지상을 거닐다간 모든 성인과 현철(賢哲)들이 말한다. 만물은 변화한다고.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관점(perspective)을 바꾸는 바로 그 순간에 진실 역시 그 옷을 바꿔 입고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 머릿 속에 들어 있는 ‘빌리 아버지’를 이제는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는 않는다. 어린 빌리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조금씩 춤을 향해
나아갔던 것처럼, 나는 그저 나를 사로잡아왔던 보이지 않는 눈과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그것이 설혹 신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질문을 시작할
뿐이다. 하물며 인간의 언어와 제도에 대해서랴. 그 방식이 냉소나 폭언이 아니라 신중하고 아름답기를 바랄 뿐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