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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박평식이 이명세 감독에게 보내는 편지

“소리죽여, 아버지가 웁니다”

이 감독! 대설경보와 함께 보낸 겨울의 끝자락에서 안부를 묻습니다. 1년이 넘은 뉴욕 생활은 견딜 만합니까. 두 아들 녀석에게는 자주 연락하는지도 궁금하네요. 오늘이 하길종 감독 기일이기에 나도 김지하 시인이 유학생 하길종에게 보낸 ‘반역의 열광’ 같은 문구의 격문을 띄우고 싶지만, 이번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영국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았거든요. 마르쿠제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선언이라도 따르려는 걸까요. 요즘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에서 옥에 갇힌 피트 포슬스웨이트의 강인한 표정, <인생은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가 가스실로 끌려가면서 아들에게 남긴 씩씩한 걸음걸이, <아름다운 시절>에서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안성기가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김승호 선생이 타계한 뒤 우리 영화에는 ‘한국인의 아버지’로 부를 만한 얼굴이 보이질 않는군요.

<빌리 엘리어트>를 감상하는 동안 이 감독이 만들고 싶었던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가족이 해체되고 부성이 사라진 시대에 진정한 아버지의 초상을 그리겠다며 이 감독은 내게 이탈리아의 젊은 작가 알도 오노라티의 <아버님 전상서>(Lettera al padre)를 소개했지요.

오노라티는 수필체로 쓴 1인칭의 그 소설에서 아버지의 개념을 ‘아주 깊고 풍요로운’ 것으로 규정한 다음 인류의 역사란 바로 ‘부모와 자식들간의 관계사’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빌리 엘리어트>에서 불쌍하고 나약한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광부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깊고 따뜻했습니다. 탄광촌이라면 진폐증부터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탄광과 발레의 관계는 십구공탄과 백조의 차이만큼이나 멀고 엉뚱한 것이겠죠. 직도 투병중인 이세룡 형이 절묘한 표현을 했었지요. ‘막장’이라는 낱말을 떠올리면 ‘노동’이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입니다. 맞아요. 더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는 최후방의 일꾼인 광부야말로 노동자의 대명사일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1984년 이후 25만명이 넘는 광부가 일자리를 잃었답니다. 우리나라도 1980년 4월에 모든 언론이 ‘무분별한 난동’으로 몰아붙인 ‘사북 사태’가 있었지요. <빌리 엘리어트>의 작은 광산촌에도 대처리즘의 철퇴가 내리칩니다. 게리 루이스가 역을 맡은 아버지는 집 안팎에서 등골이 휘어집니다. 아내가 일찍 죽은 데다 늙은 어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탄광 노조위원장인 큰아들은 날마다 경찰과 숨바꼭질을 하고, 둘째놈 빌리는 권투를 때려치운 뒤 계집애들에 섞여 이상한 춤만 춥니다. 영국영화인들은 <브래스트 오프>의 폐광촌에서 <대니 보이>를 세상에서 가장 슬프게 연주하더니 이젠 서럽도록 궁기낀 크리스마스 풍경을 보여줍니다. 빌리의 아버지는 땔감이 떨어지자 아내가 아끼던 피아노를 부숴 불을 지핍니다. 눈물로 끓인 국물 한 숟갈씩으로 끼니를 때운 주제에 울긋불긋한 모자로 멋을 부린 가족들의 꼬락서니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어요. 산타할아버지가 왔다면 틀림없이 내복까지 벗어주고 갔을 겁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웁니다. 근육 하나만 믿고 살아온 남자가 소리죽여 울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사내답지 못한’ 빌리의 손을 들어줍니다. 이럴 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라 불꽃으로 소용돌이친다는 아들의 고백에 아버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목숨처럼 지켜온 한가닥 자존심마저 꺾어버립니다. 배신자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작정한 그가 큰아들과 승강이를 하며 흐느낍니다. 노동자에게 세상은 여전히 잿빛입니다. 왕립발레학교 면접을 마친 빌리와 함께 나가는 아버지에게 시험관이 한마디를 던집니다. “파업에 행운이 있기를!”이라고요. 예술가란 그렇게 혀끝으로 알량한 인사밖에 건넬 수 없는 족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얄궂게도 아버지는 광부들이 투항하는 날에 빌리의 합격통지서를 받습니다. 파업에 실패한 사내들이 갱도로 내려가는 장면은, 이 영화를 뻔한 성공담쯤으로 깎아내리는 이들에게 펀치를 날립니다. ‘영화 빨치산’ 켄 로치가 뿌린 씨앗이 싹트는 소리가 들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청년이 된 빌리가 <백조의 호수>를 멋지게 연기하자 아버지는 또다시 웁니다. 가엾은 아버지답게 눈물도 참 많네요. 하지만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눈물을 찍어내지 않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아버지의 눈물은 삶의 마지막 물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는 <빌리 엘리어트>가 미학적으로 뛰어나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블록버스터 귀신이 씌어 분탕질하는 영화들 틈에서 이런 진솔한 작품을 만나는 게 기쁠 따름입니다. 이 감독! 좋은 영화 만들며 오래오래 좋은 아버지로 남으십시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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