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장르(<왕좌의 게임>)와 좀비물(<워킹데드>)의 역습에 다소 주춤했던 미국 수사물이 이 작품을 계기로 한 층 흥미로워졌다. 평균 1090만의 시청자 수를 기록하며 일요일 밤 미국 브라운관의 강력한 신흥주자로 떠오른 <트루 디텍티브>(케이블 채널 <HBO>)다. 속도와 반전, 캐릭터의 특이한 개성이 시리즈의 운명을 결정하던 대다수의 수사물과 달리 서서히 보는 이들의 가슴을 조여오는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장르와 오컬트 장르의 묘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드라마다. 국내 시청자의 높은 관심 때문인지 2월7일부터 매주 금요일 밤 10시 채널 스크린에서 방영을 시작한 <트루 디텍티브>는 어느덧 파이널 에피소드만을 남겨두고 있다. 다음은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를 연상케 하는, 어둠과 상징과 환영으로 가득한 이 독특한 수사물을 위한 안내서다.
미국 수사물 드라마를 좋아하는 시청자에게, 최근 몇년은 다소 실망스러운 시기였을 거다. 좀비와 뱀파이어, IT 오타쿠와 판타지 사극의 갑옷을 입은 주인공들이 뚜렷한 개성으로 자기만의 영토를 확장해나갈 때 야심차게 등장한 신작 수사물들은 미국 드라마 업계의 국민 장르다운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건 단지 시청률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첫 방영을 시작한 <블랙리스트>를 비롯해 여전히 일련의 수사물들이 미국 TV 시청률 톱20에 어김없이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워킹데드>나 <왕좌의 게임> 시리즈처럼 시청자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작품은 드물었다. 물론 짐작 가는 이유도 있다. 수사 드라마가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 시청자의 눈높이도 진화했다. <CSI>와 <24> <크리미널 마인드>로 단련된 그들은 웬만한 반전이나 치밀한 수사 기법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한동안은 독특한 이력- 뼈 전문가(<본즈>), 연쇄살인마(<덱스터>), 사기꾼(<화이트칼라>), 추리소설 작가(<캐슬>), 심지어 밤무대에서 노래하는 강력반 형사(<멤피스 비트>)도 있었다- 을 가진 주인공들이 이 장르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나 그러한 특성마저 하나의 ‘경향’이 되어버린 지금, 주인공의 직업적 개성은 더이상 수사물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활로가 없었던지 미국의 수사 드라마는 안온하게 시청률 순위권에 머무르는 대신 바다 건너편의 영국 탐정(<셜록>)들이 전세계적으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봐야 했다.
수사물의 법칙에 숙련된 시청자를 매혹시키다
미국에서 지난 3월9일 종영한 <트루 디텍티브>에 대한 평단과 대중의 뜨거운 반응은, 한동안 주춤했던 수사물 장르의 부활을 반기는 환영의 제스처로 읽힌다. <LA타임스>는 이 작품의 느리고 차분한 리듬을 언급하며 “<트루 디텍티브>에선 아무리 사소한 인물이라도 자기만의 공간을 얻으며, 독립적인 활력을 얻는다. 이 작품의 간단명료한 장면들은 프레임 너머의 삶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디펜던트>는 “다음 시즌을 기다리게 하기 위한 짜증나는 떡밥은 이 작품에 없다. 다음 시즌이 재개된다면 완전히 다른 배우들과 인물, 배경이 등장할 것”이라며 에피소드의 완결성을 이 작품의 매력으로 꼽았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말하는 <트루 디텍티브>의 매력이 최근 방영 중인 미국 수사물의 전형적인 포맷과 완전히 상반되는 특성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빠른 전개와 충격적인 반전, 자극적인 결말 등 미국 수사물의 단골 조미료를 배제한 이 작품의 담백함이 오히려 시청자에겐 신선한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트루 디텍티브>의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진입 장벽이 필요하다. 시간순으로 전개되는 작품도 아니거니와 등장인물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조차 그들의 대화와 플래시백을 통해 짐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시간적 배경은 세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 이야기는 1995년, 처음 파트너가 된 러스틴 콜(매튜 매커너헤이)과 마틴 하트(우디 해럴슨) 형사가 기묘한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을 조명한다. 그들은 루이지애나의 평원에서 가시 왕관과 사슴뿔을 쓰고 눈가리개를 한 여자의 나체 시신을 발견하는데, 조사를 거듭할수록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진다. 두 번째 이야기는 2002년을 배경으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7년 전 살인사건을 해결한 두 형사는 강력반에서 승승장구하지만, “95년 살인사건의 진범은 당신들이 검거한 사람이 아니며, 그자의 정체를 나는 알고 있다”는 또 다른 살인마의 말에 혼란스러워한다. 마지막 이야기는 2012년, 젊은 형사들의 취조를 받고 있는 마틴과 러스틴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성기 시절의 모습과 사뭇 다른 그들은 후배들에게 95년 살인사건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받는데, 그 과정을 통해 마틴과 러스틴이 강력반을 떠난 이유와 파트너였던 두 사람이 완전히 갈라서게 된 계기가 밝혀진다.
정교하게 직조된 세 갈래의 내러티브는 <트루 디텍티브>의 정서와 리듬감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각각의 시점마다 두 형사가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단서와 증언과 사건들을, 마치 시청자와의 대결을 제안하는 듯 촘촘히 풀어놓는다. 하지만 이 수많은 정보 중에서 어떤 것이 진실(truth)이고 어떤 것이 거짓(false) 정보인지를 가려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연유에선지 2012년의 두 형사는 과거에 대해 조금씩 다른 말을 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염세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러스틴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작품의 서사적 전개는 예상을 엇박자로 비껴나가는 독특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별 의미도 없는 듯 지나쳤던 장소와 인물이 이후에 중요한 실마리가 되고, 기존 수사물에서라면 반드시 살인마의 타깃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인물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등 <트루 디텍티브>는 수사물의 법칙에 숙련된 시청자를 어떻게 움직일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다음 얘기가 듣고 싶겠지?”라며 취조하러 들어온 후배 형사를 쥐락펴락하는 러스틴의 수완처럼.
루이지애나, 풍경이 아닌 캐릭터처럼
수사물로서 <트루 디텍티브>는 기괴한 모습으로 살해된 여자, 도라 랭을 죽인 연쇄살인마의 정체를 추적하는 ‘후더닛’(Who dunit/누가 죽였는가) 장르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살인범의 정체보다 그를 찾기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작품이다. 사슴뿔을 머리에 달고 죽은 여자로부터 시작해 단서를 추적하는 동안 두 형사가 마주하는 수많은 초자연적 현상과 불길한 상징들은 하드보일드 누아르 장르에 가깝던 이 드라마에 오컬트적인 정서를 덧입힌다. 장르 소설 작가(<갤브스톤>)이자 자신의 예술적 아버지로 H. P. 러브크래프트와 윌리엄 포크너, 레이먼드 챈들러를 언급하는 크리에이터 닉 피졸라토의 취향이 <트루 디텍티브>에 반영되었다는 점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중에서도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이 드라마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는 <트루 디텍티브>의 러스틴은 종종 “십자가에 매달리는” 상상을 하는 남자이자 ‘인류는 번식을 멈추고 멸종해야 한다’고 믿는 염세주의자다. 루이지애나로 전입해 마틴과 함께 살인사건을 맡기 전 마약 갱단에 위장전입한 그는 약물 후유증으로 환각을 본다. 기독교적인 상징과 인간에 대한 불신, 러스틴의 환각을 통해 보여지는 상상의 범위를 초월하는 두려운 존재들은 <트루 디텍티브>의 음울한 테마이자 러브크래프트 작품의 중요한 원천이기도 하다. 이처럼 수사 과정의 화려한 기교나 트릭에 의존하는 대신 정서와 분위기로 승부하는 이 작품의 개성은 <트루 디텍티브>를 범상치 않은 수사물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 데 일조했다.
미국 남부에 위치한 루이지애나의 정적이고도 퇴폐적인 풍경은 악마 의식을 즐기는 상상의 살인마가 배회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시리즈의 연출을 맡은 캐리 후쿠나가(<제인 에어>의 감독이다)의 35mm 필름 카메라는 루이지애나의 음습한 늪지대와 빛바랜 평야, 태풍이 몰아친 이후의 수몰지역을 종종 유려한 트래킹 숏으로 포착한다. 흥미로운 점은 각본을 쓴 피졸라토가 루이지애나주에 큰 타격을 입혔던 두 차례의 허리케인, 앤드루(1992)와 카트리나(2005)를 중요한 드라마적 사건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허리케인 상륙 당시의 루이지애나의 현실에 <트루 디텍티브>는 미스터리한 살인마가 죽음의 축제를 벌였다는 가설을 슬쩍 끼워넣는다. “모든 게 혼돈에 휩싸였지. 어떤 사람은 실종됐고, 어떤 사람은 죽었어. 경찰도 죽었지. 내 생각에 그는 정말 좋은 한해를 보냈을 거야.”(러스틴 콜) 현실의 비극적인 사건과 사색적인 풍경에 가상의 잔혹한 도시 전설을 덧입힌 <트루 디텍티브>의 주요 무대, 루이지애나는 두 주인공을 잇는 “제3의 캐릭터”(닉 피졸라토)다.
에미상의 강력한 후보, 매튜 매커너헤이
주로 할리우드를 기반으로 활동해왔던 매튜 매커너헤이와 우디 해럴슨의 콤비 플레이는 그들에겐 익숙지 않은 무대일 TV드라마에서도 빛을 발한다. 러스틴을 연기하는 매튜 매커너헤이가 뜬구름 잡는 말투로 “이 장소는 마치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도시 같아. 점점 잊혀져가는…”이라고 말할 때,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라고 쏘아붙이는 우디 해럴슨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트루 디텍티브>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청교도적인 엄격함으로 자신을 억누르는 침울한 남자(매튜 매커너헤이)와 평범한 가장이지만 미녀에 사족을 못 쓰다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마초맨(우디 해럴슨)의 동반 수사기는 다소 무게중심이 한쪽으로(당연히 매튜 매커너헤이다) 기울어져 있지만 보기에 아쉬움이 남는 정도는 아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외모를 연상시키는 2012년의 러스틴으로 분한 매튜 매커너헤이는 삶의 무게에 짓눌린 얼굴과 쇠락한 육체를 이끈 채 묵묵히 암흑의 중심부로 걸어들어간다. 그의 모습에 호평을 보낸 대다수의 미국 언론은 아직 기한이 한참 남은 에미상(8월) 남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자로 매튜 매커너헤이를 지목하고 있다.
“내 인생은 폭력과 타락의 연속이었지. 내가 기억하는 한 늘 그랬어. 이제 그걸 끝낼 때가 됐어.” <트루 디텍티브>의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서 러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방영은 이미 끝났지만, 국내 방영사인 스크린에선 연쇄살인마와의 본격적인 대결이 펼쳐질 마지막 에피소드 방영을 앞두고 있다. 긍정적인 반응에 힘입어 <HBO>는 시즌2의 방영 계획을 논의하고 있으나 매튜 매커너헤이와 감독 캐리 후쿠나가가 이 시리즈에서 떠날 것을 확언했기에 러스틴의 모습을 보는 것도 시즌1의 파이널 에피소드가 마지막이 될 듯하다. 루이지애나의 습기와 잔혹한 살인마, 현실인지 환각인지 모를 미스터리한 존재들과 회색 지대의 탐정들이 배회하는 이 세계의 문이 곧 닫히려 하고 있다. 이것이 영원한 작별인사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트루 디텍티브>를 더욱 빛내는 +α
오프닝 시퀀스
에미상 시상식에 ‘올해의 오프닝 시퀀스’(사진) 부문 상이 있다면 <트루 디텍티브>도 여지없이 후보에 올랐을 것이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의 얼굴과 (작품과는 전혀 관계없는) 멕시코 연안의 황폐한 공장 지대가 오버랩되는 이 드라마의 오프닝 시퀀스는 본편의 느리고 음울하며 황폐한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트루 디텍티브>의 오프닝 시퀀스를 작업한 곳은 호주 스튜디오 엘라스틱. 이 스튜디오의 관계자는 이중 노출 기법을 이용해 드라마 푸티지와 미국의 풍경 사진가 리처드 미라시의 책 <석유화학의 미국> 속 멕시코 공장의 모습을 장면마다 녹여 담았다. ‘암적인 골목’이라 불리는 걸프 연안의 공장들이 타락의 늪에 빠진 드라마 속 루이지애나의 부패한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들은 <트루 디텍티브>의 하드보일드한 개성을 살리기 위해 사진을 스캔한 뒤에도 노란색과 녹색으로 염색하고, 거친 질감이 살아나도록 매만지는 작업을 했다고.
T 본 버넷의 컨트리 뮤직
호주의 스튜디오 엘라스틱이 제작한 오프닝 시퀀스에 흐르는 컨트리음악(<파 프롬 애니 로드>)을 듣고 곧바로 이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T 본 버넷! 스스로를 “레이먼드 챈들러와 대시엘 해밋의 열렬한 팬”이라 칭하는 이 컨트리 뮤직의 거장은 <트루 디텍티브>의 크리에이터 닉 피졸라토의 요청을 받고 드라마의 사운드트랙을 프로듀싱하는 작업을 맡게 되었다고. 처음 이 프로젝트에 합류했을 때 그와 피졸라토는 루이지애나의 끈적한 블루스와 케이즌(블루스와 포크음악이 결합된) 뮤직은 절대 쓰지 말자고 합의를 봤단다.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캡틴 비프하트의 <클리어 스폿>을 비롯해 보 디들리의 <브링 잇 투 제롬>, 스테이플 싱어스의 <스탠 바이 미> 등이 수록된 <트루 디텍티브>의 사운드트랙은 드라마의 농도를 더 짙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T 본 버넷은 이번 작업을 두고 “8시간짜리 영화음악 작업을 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공을 많이 들였다는 얘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