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에 영화를 보고 11시에 방금 장엄한 최후를 맞이한 주인공을, 방금 본 믿을 수 없는 이미지를 만든 감독을 코앞에서 만나는 것. 영화제는 그런 거짓말 같은 행운이 잠시나마 가능해지는 마법의 시간이다. 하늘색 하늘을 도무지 보기 힘든 음울한 2월의 베를린이지만,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지하의 기자회견장만큼은 종일 카메라 플래시로 눈이 부시다.
▦깜짝 키스쇼
제프리 러시는 존 부어맨의 <파나마의 재단사>와 비경쟁 상영작 <퀼즈>의 주인공으로 두 차례나 제51회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회견장 단상에 앉았다. 게다가 풍부한 조크와 키스신(?)까지 연출해 색다른 사진과 에피소드에 굶주려 있는 기자들을 행복하게 했다. <퀼즈>의 출연 결정 이유를 묻자 제프리 러시는 “케이트 윈슬럿에게 진한 키스를 할 수 있는 데다가 돈까지 받는데 어떻게 망설이겠냐”고 답했고 감동한 윈슬럿은 달려와 그의 허리를 젖히고 입맞춤을 퍼붓는 시늉을 했다.
▦웃음으로 추위 잊으세요
터키계 이탈리아감독 페르잔 오즈페텍의 경쟁작 <무지한 요정>은 지중해의 햇살과 향기로운 와인에 삶의 씁쓸한 맛을 곁들인 코미디. 죽은 남편의 숨겨진 게이 애인과 그의 퀴어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의 공동체에 이끌려 들어가는 여성의 경험을 그려, 베를린영화제 출품작 대상의 퀴어영화상인 ‘테디 베어 어워드’의 후보로 일찌감치 이름을 올렸다. TV 미학에 경도된 주류 이탈리아영화와 구별되는 작품을 골랐다는 드 하델른 집행위원장의 공언에는 잘 어울리지 않으나, 추위에 움츠린 영화제 초반 객석에 폭소를 선사한 오즈페텍 감독은 8일 기자회견에서 “내게 사회적 성(gender)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섹슈얼리티가 있을 뿐”이라고 호언했다.
▦변한 건 없어
“댁은 대체 어디 사시오?” 대중매체 속 흑인의 이미지가 지난 40년간 그래도 진보하지 않았냐는 미국 기자의 긴 질문을 스파이크 리는 단칼에 일축해버렸다. 베를린이 초청한 그의 새 영화 <뱀부즐드>는 코너에 몰린 흑인 TV프로듀서가 백인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흑인 스테레오타입을 연기하던 인종차별적인 쇼를 흑인 스타를 내세워 리메이크해 벌어지는 희비극. 제작비 문제로 디지털로 촬영했으나 스타일리스트 스파이크 리의 재능을 재확인하는 데 아무 무리가 없다. 심드렁하고도 단호한 어투로 질문들을 척척 걷어내던 스파이크 리는 헤비급 권투선수 조 루이스와 막스 슈멜링이 등장하고 히틀러, 무솔리니, 괴벨스가 원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차기작의 일부를 베를린에서 촬영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혀 독일 기자들을 솔깃하게 만들기도 했다.
▦우문에 현답
<로망스>로 소용돌이를 불러왔던 카트린 브레야 감독의 경쟁부문 출품작 <내 누이에게>의 공동 인터뷰는 국제영화제 기자회견장이 꼭 ‘주례사’ 같은 덕담만 오가는 자리가 아님을 증명한 자리였다. <내 누이에게>는 마치 에릭 로메르 영화처럼 두 자매의 여름 휴가와 둘 사이에 흐르는 애증을 시시콜콜 그려가다가 돌연한 폭력으로 치닫는 영화. 감독, 배우의 화기애애한 입장으로 시작한 인터뷰는 “희생자를 고문하다 죽여버리는 걸 보는 듯하다. 할말도 없으면서 90분간 나를 지루하게 한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텐가?”라는 첫 질문에 꽁꽁 얼어붙었지만, 논쟁에 익숙한 브레야 감독은 “당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만 만들라는 법은 없다”고 차분하게 응수했다.
▦천진난만,생글생글
덴마크에서 온 여성감독 최초의 도그마필름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는 올해 베를린 최고의 기습 히트작. 고향에서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가 거두고 있는 기록적인 흥행 덕택인지 아니면 명랑한 천성 덕분인지 웃음 반 대답 반으로 기자회견을 일관한 셔픽은 도그마영화가 이렇게 천진난만해도 되는 거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생글거리며 답했다. “그저 별볼일없는 인생을 조금 더 괜찮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 싶었다. 바로 내가 요즘 겪고 있듯이!”
▦내 아들이 최고!
<이누가미>는 한 여인을 중심으로 얽히고 설킨 오디이푸스적 비극을 일본식 매너로 그려내 서양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아들이자 출연배우인 유진과 함께 나타난 하라다 마사토 감독은 자기집 거실에만큼은 오이디푸스의 유령을 초대하지 않는 듯, 유창한 영어로 ‘부자유친’을 과시했다. “나는 기타노 다케시가 아니라 직접 내 영화에 출연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들은 내게 일종의 스크린 속 ‘얼터-에고’다. 자라면서 언젠가는 나의 자전적 영화에서 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랑도 잊지 않았다. “게다가 2개 국어에 능한 젊은 배우는 일본영화산업에서 소중한 존재다.” 고마워요, 아빠!베를린=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