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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미 시게히코
2001-03-09

비평의 주술사, 열도를 포박하다

◆일본영화계의 전설 하스미 시게히코를 만나다

"나와 구로사와 기요시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평론을 모태로 데뷔작을 만들었다. 싸구려 핑크영화였지만 하스미씨는 우리 둘을 극찬했고, 그 비평으로 인해 핑크영화를 안보던 이들도 극장으로 몰려갔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수오 마사유키(<쉘 위 댄스><으라차차 스모부>)의 이 발언은 두가지 점에서 놀랍다. 한국 풍토에선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한 사람의 평론이 창작의 모태가 됐다는 것, 그리고 그의 평론이 관객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계영화계 전체를 뒤져도 유례를 찾기 힘든 평론가다. 수오와 구로사와를 포함해 오늘의 일본 영화계를 이끄는 쟁쟁한 중견들을 감독의 길로 이끌고, 영화관객들에겐 둘도 없는 지침서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하스미 시게히코다. 더욱 의아스러운 점은 그가 프랑스에서 플로베르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들뢰즈와 푸코를 일찌감치 일본에 소개한 선구적 학자이며, 현재 도쿄대 총장으로 재직중인 거물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의 평론이 그의 화려한 지적 배경과는 달리 철저히 영화광적이며 기존의 평론이 이르지 못한 경지를 개척했다는 점일 것이다. 전설이라고 불러 과하지 않은 경이로운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를 만난다.- 편집자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가 영화에 대해 쓴 글을 읽다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은 이 사람이 엄밀한 논리성 따위에 별 관심이 없어보인다는 점이다. 그가 저명한 불문학자라는 사실, 즉 아카데미의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확실히 이것은 의외로 보인다. 그의 영화글을 우선 특징짓는 것은 시네필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영화에 강렬한 애정과 집착이지 그에 대한 분석이나 해명이 아니다. 그 자신이 여러 번 공언하고 있는 대로 영화는 “흥분의 대상이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1985)의 말미에 실린 그 자신의 영화체험에 대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는 편에 가까웠다고 한다. 특별히 어떤 감독이나 배우의 작품을 골라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영화는 거의 다 보는 편이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만원의 재개봉관 맨 앞줄 구석에서 르네 클레르의 <침묵은 금>을 끝까지 보다가 안면마비로 한달간 통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이러한 성장기의 집중적인 ‘영화세례’야말로 그를 보통의 지적인 영화평론가들과 차별화하는 점일 것이다. 그는 그리하여 교양으로서의 영화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이다. 그가 보기에 지적 평론가들은 이를테면 버드 버티처, 스즈키 세이준(鈴木淸順)이나 가토 다이(加藤泰) 같은 B급 장르영화의 매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이다. 60년대 초반 파리 유학 시절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많이 드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은 자주 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냥 보통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이다. 예술적 가치에 있어 혹은 문화적인 중요성에 있어서 확실히 인정받은 작품들을 골라 보는 태도는 그가 보기에는 ‘시네필적인 쾌락’과는 사실 양립하기 어려운 태도일 것이다. 언뜻 보아 쓰레기 같아 보이는 작품들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는 발견의 쾌감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영화체험의 ‘일회성’에 대한 거의 오만할 정도의 자부심. 일찌감치 이러한 시네필적인 악덕(!)이 몸에 밴 이 쾌락주의자는 그리하여 ‘심각한’ 영화만 보는 지식인들 그리고 영화를 진지한 표정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다소간의 경멸을 숨기지않는 것이다.

도발적인 어투,호흡 긴 문장

그럼 여기서 시가 다카오(志賀隆生)가 쓴 <하스미 시게히코>를 참조하면서 그의 평론가로서의 경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플로베르 연구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일본에 돌아와 한 최초의 작업은 롤랑 바르트, 미셀 푸코, 질 들뢰즈 등의 인터뷰를 발표한 것이었다. 70년대 초반 일본에서도 구조주의 이후의 프랑스의 지적 동향에 지극히 민감했던 시대에 그는 첨단의 흐름을 대단히 명석하게 소개함으로써 문명을 얻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 평론가로서의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해준 것은 1979년에 발표한 <표층비평선언>이었다. 책의 모두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어떤 부자유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읽는 것, 쓰는 것 그리고 사고하는 것에 반드시 끼어드는 그런 부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부자유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에 가까운 그런 경험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라고 믿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야기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드물게 자신을 잊고 심지어는 세계를 잊어버리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경이적인 예술작품을 조우했을 때나 아니면 놀라운 영화를 발견했을 때 말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은 항상 언어화,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야기로의 탈바꿈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의 틀로 편입돼야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가능한 그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계체험이라 해도 좋을 이 체험은 일상적인 레벨 즉 평준화된 세계로 끌어내려지고 만다. 어떤 대상이 계측가능한 깊이 혹은 내부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면 한계체험은 더이상 한계체험이 아니라 일상적인 체험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비평이란 존재가 과잉된 어떤 것과 황당무계한 조우를 연출하는 철저하게 표층적인 체험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체험을 그 고유성에 있어서 그대로 살려내는 ‘표층적인 비평’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스미의 전략은 언어를 그 극한에까지 밀어붙여서 거의 그 의미가 쉽게 포착되지 않는 지점으로까지 몰고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미작용이 거의 상실되는 지점까지 언어를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의 독특한 문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일본어 문장으로는 구두점이 극히 적으면서 대단히 호흡이 긴 그의 문장은 그냥 읽으면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거기에선 일종의 “주술적인 리듬”까지 느껴진다. 도발적인 어투, 그리고 종래의 일본어 문장으로는 거의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호흡이 긴 문장. 바로 이런 것이 일본의 비평계에서는 ‘하스미적인 것’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비평, 고통스럽고 감미로운 체험

그의 문학비평이 체험의 안이한 일반화에 대한 도전의 시도로 점철되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 명확해졌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그의 영화체험과 별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영화는 우리의 감정을 움직인다(感動). 하지만 이 감동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존의 이야기의 틀을 빌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그 감동은 더이상 감동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그 체험의 일회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방도는 이야기의 틀에 포섭되지 않는 부분, 즉 과잉의 부분에 대해 집착하는 것 밖에 없다. 그것은 얼마 전 국내에 번역된 <감독 오즈 야스지로>(한나래 펴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즈 영화에서 내러티브의 진전이 항상 다른 요인에 의해 추동된다는 것을 밝히는 대목 등이 바로 그런 과잉의 부분에 대한 그의 남다른 예민함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이를테면 <외아들>에서 도쿄에서의 아들의 실패가 음식의 이동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명확해질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대목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과잉의 부분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관찰도 종내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의 틀에 결국 포섭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하스미의 비평은 이 지점에 이르러서 거의 비극적인 정조를 띠게 된다. 이야기의 기만성은 너무도 완강한 것이어서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체험의 언어화’란 커뮤니케이션을 아예 포기하지 않는 다음에야 결코 가능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모험에 뛰어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비평이 드라마틱한 것도 바로 이런 점에서 연유한다. 본인의 의도가 어떠했던지에 관계없이 그는 항상 장대한 ‘실패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야기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부자유에 대해 새삼 깊이 공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마조히즘적인 쾌락을 맛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계체험을 타인과 공유하려는 것이 비평적 욕구의 출발점이라면 그것은 결국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주게 되지만 그것은 달리 보면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운 체험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광들의 신,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발견하다

70년대 중반 이후 일본영화계에 하스미의 비평 및 활동이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지적인 영화청년들 사이에서 그는 거의 신화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도쿄대와 릿교대에서 그의 영화강의는 청강생들로 교실이 미어터질 정도였고 평론가 지망생들은 그의 글을 흉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직접적인 제자로 감독이 된 인물만 꼽아도 구로사와 기요시, 수오 마사유키, 아오야마 신지, 나카다 히데오 등이 있고 평론가가 된 인물 중에는 요모타 이누히코, 마쓰우라 히사키 등이 있다. 90년대 이후에는 그가 예전만큼 영화에 대한 글을 많이 쓰지 않으면서 영향력이 많이 떨어진 감이 있지만 아직도 그 영향력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5년 전에 교토영화제에서 영화논문을 현상모집했을 때 어느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응모작 중에 모 평론가의 글의 영향이 느껴지는 글들이 너무 많아 실망했다. 자기 글을 쓰도록 좀더 노력해주기 바란다.” 이 모 평론가가 하스미를 지칭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영화문화에서 하스미의 영향력이 크게 느껴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단순히 글만 쓸 뿐 아니라 상영활동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데 있다. 1985년에 영화계간지 <뤼미에르>를 창간한 그는 그의 명명에 의하면 ‘1973년의 세대’에 속하는 감독들 즉, 빔 벤더스, 빅토르 에리세, 대니얼 슈미트,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의 작품을 일본에서 제대로 평가하는 데 공헌했을 뿐 아니라 대니얼 슈미트 같은 경우 그의 회고전을 일본에서 조직하기도 했던 것이다. 1973년은 존 포드가 죽은 해이면서 동시에 ‘존 포드적인 것’으로 대변되는 할리우드영화의 양질의 부분을 계승한 위의 감독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해라는 점에서 1959년 누벨바그의 등장 못지않게 중요한 영화사적 시점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과연 그의 지적대로 이 세대의 감독들 중 대니얼 슈미트를 제외하면 모두 세계적인 대가가 된 것을 보면 그의 선견은 확실히 인정해줄 만하다. 특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가로서의 평가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미 70년대에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중요한 작가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감독들 외에도 그는 소련의 렌필름의 대표작들을 모아 일본에서 상영하기도 했고 하워드 혹스 회고전, 장 르누아르 회고전 등에 관여하기도 했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취미

하스미의 영화에 대한 접근을 ‘취미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쉽다. 80년대 이후 일본의 비평가로서 그와 어깨를 견줄 만할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라타니 고진은 어느 자리에서인가 하스미를 가리켜 “일본적 스노비즘의 대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확실히 그의 비평에서는 자신의 취향을 절대화하는 면이 보인다. 이를테면 그는 신인감독의 영화를 볼 때 이 감독이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 것인지 속으로 내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내기에서 진 적이 별로 없음을 은근히 자랑한다. 가령 60년대 초 그는 루이 말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와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을 때 그는 루이 말은 아니다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과연 그의 생각대로 고다르와 루이 말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명확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오즈에 대한 그의 말을 떠올려보자. “오즈의 영화는 시니피앙의 연쇄로 이루어진 것으로 시니피에의 통제로부터 자유롭다. 즉 작품은 이야기의 그럴듯함을 유지하려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화면의 논리에 종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미의식의 문제는 아니다. 회화적인 구도의 아름다움조차 배제한, 순수한 영화적 모험인 것이다.”(<영화는 어떻게 죽는가>에서) 확실히 이 정도라면 가히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취미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쿄 = 임재철/ 영화평론가 marienba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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