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이 되기까지
송일곤(31) 감독이 폴란드로 유학을 떠난 건 당연했다. 그를 매료시킨 도스토예프스키의 후예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더 거슬러 그에게 필름의 마력을 가르쳐준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의 무대였으니 말이다. 물론 전령사는 따로 있었다. <이방인>의 문승욱 감독. 먼저 폴란드 국립영화학교 우츠에서 수학중이던 문승욱 감독은 94년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만난 송일곤 감독에게 그곳의 영화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35mm 카메라로 단편영화를 맘껏 찍을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배울 수 있고, 무엇보다 걸작들을 직접 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그로 하여금 2주 만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동유럽으로 날아가게 할 만큼 솔깃한 것이었다. 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잉마르 베리만, 페데리코 펠리니만이 아니었다. 직접 확인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은 ‘사람을 세밀히 관찰하는 지긋한 시선’을 일러줬고, 채플린의 부담없는 시선들 또한 행복한 시간을 안겨줬다.
졸업 뒤 99년 한국으로 되돌아온 송일곤 감독은 충무로로 가는 직행티켓을 쥔 듯했다. 폴란드에서 만들었던 <광대들의 꿈> <간과 감자>가 국내 극장에 개봉하면서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은 상태였고, <소풍>은 제52회 칸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쥐었다. 장편데뷔작으로 공들여 쓴 <칼> 시나리오는 부산국제영화제 제2회 PPP에서 Sony PCL이 후원하는 KF-MAP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흥행을 자신하는 투자자들이 없어 미루어졌고, 결국 씨앤필름이 제작하는 디지털영화 <꽃섬>이 그의 데뷔작이 됐다.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세 여인이 우연히 만나 꽃섬을 찾아가는 로드무비 <꽃섬>은 지난해 만들었다 여고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유기하는 장면 때문에 상영되지 못한 옥외전광판용 영상물 <플러쉬>에다 기존에 갖고 있던 아이디어를 결합한 시나리오다.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송일곤 감독의 키워드를 추려내면 폭력, 희생, 제의, 구원 정도가 될까. 그가 항상 클로즈업하는 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상처”다. 폭력에 희생당한 상처는 매번 환상을 치유의 과정으로 갖는다. <광대들의 꿈> <간과 감자> <소풍> 모두 현실의 시계추가 정지한 듯한 환상 장면이 끼어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상처입은 세 여자의 로드무비인 <꽃섬> 역시 그렇다. 감독은 “자세히 일러줄 순 없지만, 판타스틱한 여정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PD150과 PD100, 두대의 디지털카메라로 작업하기 때문에 스토리 보드대로 찍던 종전의 방식을 고수할 수도 없고, 섬세한 미장센을 구성할 수도 없어 답답할 때가 있긴 하다. 하지만 자연광을 이용해 사실적인 다큐의 느낌을 내는 식으로 역이용할 수도 있어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다. 가장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부분은 리허설이다. <플러쉬> 촬영 때 10시간 이상 화장실에 갇혀 연기했던 배우가 탈진한 순간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디지털카메라였기 때문에 그 표정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꽃섬>은 배우들의 정서가 바깥으로 터져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송일곤 감독은 자신의 작품이 관념적이라는 지적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비판받을 부분은 아니라고 여긴다. 관념적인 것을 관념적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감독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은 <칼>이라고 못박는 그는 짬을 내서 어머니의 기억을 시적인 다큐멘터리로 풀어내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꽃섬>은 어떤 영화
우연이었을까. 어린 딸에게 피아노를 사주려다 오히려 가족한테 버림받은 30대의 옥남, 뮤지컬 가수이지만 후두암으로 더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20대 유진, 화장실에서 유산한 10대 혜나. 이들 세 여자는 육지의 삶으로부터 밀려나는 과정에서 우연히 조우한다. 옥남은 혜나와 버스에서 만나 동행하게 되고, 승용차에서 자살하려던 유진은 옥남과 혜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이들은 남해 어딘가에 있는 꽃섬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정말 우연한 동행이었을까. 꽃섬은 신비한 섬이라는 기대를 품고 떠나지만 막상 목적지에 도착한 이들의 눈에 섬은 섬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구원해 줄 그런 공간은 없는 것일까. 안식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답은 여행에 있다.이영진 기자 ant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