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시간 촬영에, 햄버거랑 콜라 한끼만 준 곳도 있대
잠깐 웃고 떠드는 사이 리허설이 시작됐다. 팀장이 대강 얼굴을 확인하더니 연출부가 알려준 배치대로 인력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침 촬영은 주막집 손님으로, 평상이며 멍석에 앉아 국밥 먹는 한컷이 전부인 모양이다. 진짜 밥을 먹는 건 아니지만 무거운 장창을 쥐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는 전쟁장면에 비하면 A급이라고 할 만한 편한 촬영이다. 물에 뜨기는 하지만 수영이 서툰 K는 병졸로 분장하고 배를 탔더니 부두는 한없이 멀어지고 아무리 둘러봐도 안전요원을 찾을 수 없는 현장에 나가본 다음 그 드라마는 접기로 했었다. 그래도 나중에 듣기로는 불화살 떨어지는 무서운 장면보다는 나았다고 했다. 다행히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지만 K의 동료 한명은 권총 맞는 장면을 연기하다가 정말 화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불꽃을 뿜는 폭죽이 가슴에서 터지면 그 반대쪽으로 쓰러져야 하는데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 엉겁결에 폭죽을 깔고 쓰러졌던 것이다. 다행히 상해보험에 가입한 기획사의 일이었으니 망정이지. 보조출연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 영화사와 기획사가 서로 책임을 미루기 일쑤다.
해는 점점 높이 뜨고 주연배우도 나오지 않는 장면인데 감독은 벌써 네 번째 같은 장면을 찍고 있다. 처음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해가 되질 않았고,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는 게 쑥스럽고 귀찮기도 했었다. 게다가 마땅히 앉아 있을 장소가 없으면 기다리는 시간은 고문이었다. 얼마 전에 월드컵 경기장에서 찍은 CF는 빽빽한 공간에 보조출연자를 몰아넣고 몇 시간을 서 있게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늘은 장소가 민속촌이어서 나무 그늘도 많고 보조출연 인원이 적은 탓에 티테이블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복면을 맡은 청년 하나는 감독이 군것질을 즐기는 현장에 가면 티테이블에 간식이 많아 좋다며 맛동산 좋아하는 J감독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연예인이 보고 싶어서 보조출연을 시작했다가 벌써 1년째 일을 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는 목표로 삼았던 여배우 다섯명 중 마지막 남은 전지현만 보면 일을 접겠다고 했다.
주막장면을 찍고 놀랍게도 제때 점심을 먹고 왔더니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보조출연자 촬영 분량이 없다고 한다. 저녁 먹고 의상을 갈아입고 리허설을 할 거라고 하니 앞으로 서너 시간은 한가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명상집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다가 무료해진 K는 야트막한 정자 비슷한데 모여 잡담에 한창인 동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요즈음 보조출연자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어떤 영화 현장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22시간가량을 촬영하면서 식사는 한끼, 그것도 햄버거와 콜라만 제공한데다 일당은 6만원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여, 인터넷 카페 등에 기록적인 숫자의 게시물을 기록한 영화다. 감독이 보조출연자들에게 욕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역시나 A의 목소리가 가장 높다. 최근에 지방 현장에 갔다온 그는 서울에서 밤 12시30분에 출발해 전라도에서 하루를 꼬박 촬영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 서울에 도착했는데도 4만5천원밖에 받지 못했다고 했다. 뜨거운 도로에서 구르고 옷에는 가짜 피까지 묻었는데도. 다들 웃는 낯으로 보이콧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 모 기획사를 비아냥대고 있지만 속은 타들어갈 것이다. 처음 일을 시작할 무렵 K는 선배들로부터 기본 일당이 2만7천원에서 3만원으로 오르는데 최소 7, 8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오르지는 못할망정 내려가고 있으니. 게다가 부산에선 150∼200명이나 되는 보조출연자들의 일당을 통째로 떼어먹은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국영화가 열악하던 시절 임금 떼어먹는 경우가 하도 많아 당일 지불이 정착된 거라는데, 그것마저 떼먹히고 있으니, 점점 이 일에 정이 떨어진다.
가끔 단역배우 시켜줘도 신경만 더 쓰여~
철야에 대비하여 하나둘씩 토막잠을 청하고 있을 무렵 팀장이 “보조출연분들, 식사하고 오세요!”라며 사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6시가 조금 넘었다. 놀랍게도 두끼나 제시간에 챙겨먹고 있으니 특A급 현장이라 할 만하다. 식당에선 밤촬영에 합류할 팀이 한발 먼저 와서 밥을 먹고 있었다. 현장에서 ‘대모 아줌마’라 불리며 군중신 지휘를 맡은 적 있는 베테랑 연기자가 눈에 띈다. 이제 막 보조출연을 시작한 초보가 곁에 있다면 저 아주머니와 친해져서 전화번호도 주고받고 하면 일거리 얻기가 수월해질 거라고 귀띔해줄 테지만, 오늘은 모두 나름대로 경력자들뿐이다. 현장에서 급하게 단역배우가 필요할 때면 K처럼 경력이 되는 보조출연자 중에서 한명을 뽑아 대사나 중요한 동작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단역배우가 하면 일당을 몇배나 받을 일을 그들이 하면 그대로 3만원짜리일 뿐, 힘만 들고 신경만 쓰이는 데다가 어쩐지 속도 상했다.
밥을 먹고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 의상팀이 갈아입을 의상을 옷걸이에 걸고 나와 크기와 색깔을 대보며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여자는 왼쪽 버스, 남자는 오른쪽 버스가 탈의실이다. K는 전에 스무살 갓 넘은 아가씨가 남자들하고 룸살롱 방 하나에 몰아넣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며 울먹이기에 마음이 안됐던 기억이 떠올랐다. 버스에서 나오니 팀장이 인원을 체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야외에서 찍는 밤장면이어서 해가 뜨면 어쨌든 철수한다는 거다. 요즘은 해가 다섯시쯤 뜨던가. 욕먹고 있는 그 영화처럼 아침 일곱시에 끝내준다고 하고선 밤 열시까지 끌고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오늘은 정말, 괜찮다.
어느덧 해가 지니 더위는 한풀 꺾인 대신 모기가 기승이다. 티테이블에 뿌리는 모기약이 있기에 드러난 부분은 대충 뿌렸지만 청바지도 뚫고 들어오는 게 한여름 모기다. 소일 삼아 가끔 나오는 할아버지 한분은 저고리를 벗어들고 연신 웃통을 때리며 모기쫓기에 여념이 없다. 저 할아버지는 집에 있기가 심심해 드문드문 일이 생길 때마다 보조출연 일을 하지만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홈쇼핑과 CF는 거절한다고 한다. 먹고사는 데 지장만 없다면 악덕 기획사 찾을 일도 없고, 사극보다는 편한 현대극만 하겠지만, K는 그럴 처지가 못 됐다. 정말 이 일이 좋아서 하는 이도 있지만, 고급 승용차 몰고 취미 삼아 일나오는 보조출연자를 보면, K는 은근히 속이 쓰렸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복면 청년들도 검을 들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다. 말을 터보면 저들도 못 볼 꼴을 많이 봤다지만 한창 일거리가 많은 나이인데다 언제든 다른 직업으로 옮겨갈 수 있는 젊음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보조출연을 전담하는 연출부와 팀장이 마당을 누비며 자리를 지정하고 동작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자, 아저씨가 좋은 패가 나온 거예요. 얼씨구! 하는 몸짓으로 일어나서 춤을 추면, 거기 그분이 멍석쪽으로 걸어오고….” 스테디캠으로 마당을 구석구석 보여주는 장면이어서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하고, 왁자지껄한 잔칫집 분위기가 나게 쉴새없이 웃고 떠들어야 한다. 이런 장면엔 경력이 많은 보조연기자가 발탁되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일당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다. 아니, 경력에 따라 일당을 차등지급하면 몸값 비싸다고 갈수록 찾는 이도 적어지려나? K는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자 신경을 곤두세웠다. 수십명이 일하는 현장에서 내가 잘못하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K는 스테디캠이 들어오고 주막 주인 역의 배우가 술항아리를 가지고 지나갈 때쯤 멍석 위에서 신명나게 윷을 쥐고 흔들며 “모 나와라, 모!” 목청을 높였다.
새벽 두시쯤 야식을 먹고 몇 시간 버티다가 날이 밝으면 일당 9만원이 손에 들어오리라. 보름달은 높이 떴고, 해와 달을 구분 못하는 장닭들은 새벽처럼 울어대고 있다. 조명이 휘황하여 닭들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K는 멍석 위로 돋아난 지푸라기를 쥐어뜯다 새삼스럽게 아주 조금, 쓸쓸해졌다. 수십 킬로와트짜리 조명이 마당을 밝혀도 처마 밑 평상 위에 술상을 놓고 앉은 보조출연자들은 언제까지나 이 마당이 그늘 같기만 할 것이다. “한번만 더 갑시다!” 모니터를 확인한 감독의 외침에 K는 정신을 차렸다. 날이 밝으면 촬영이 끝나겠지, 내가 계산한 대로 9만원이 맞았으면. 사소한, 그러나 지금 당장은 너무나도 절실한 걱정거리가, K의 마음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기사는 보조출연자들과 보조출연 업체, 영화 스탭 등을 취재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드라마 보조출연과 영화 보조출연의 차이점
보조출연자는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하는 학생과 직장을 옮기는 사이 잠깐 일하는 젊은 층, 퇴직한 다음 소일거리 삼아 나오는 노년층, 생활비를 버는 ‘생계형’ 출연자 등으로 구성된다. 등록된 보조출연자는 3천명 정도지만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인력은 1천명에서 1500명 사이. 분야는 드라마와 영화, 홈쇼핑, CF 등으로 다양하다. 이중에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야는 드라마다. 한번 시작하면 고정출연할 수 있고 촬영도 자주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보조출연자의 중복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드라마와 달리 몇번 출연하면 관객이 얼굴을 알아본다며 인력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한다. 그 때문에 보조출연자 중에서는 카메라에 얼굴이 나오는 것을 꺼려하는 이도 있다. <거룩한 계보>에 교도관으로 얼굴이 나갔던 보조출연자는 무심코 한번 더 갔다가 감독이 얼굴을 알아봐서 교체되기도 했다. 한 보조출연 업체에 따르면 드라마를 주업으로 삼고 쉬는 날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달에 25∼27일 정도 일하면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지만, 정기적으로 일거리가 있다는 보장이 없어 힘들다고 한다.
일당과 식사문제
보조출연자는 일당과 식사에 가장 민감하다. 보조출연 업체와 제작부, 보조출연자들 모두 이 부분에선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만, 그 입장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당이 시간에 따라 지급되기 때문에 보조출연자들은 일이 언제 끝나는지 얼마를 받게 되는지 미리 알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잠깐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 아니라면 보조출연자도 촬영이 언제 끝나는지는 감독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업체마다 산정 기준이 미묘하게 다르고 약자인 보조출연자로서는 자기 주장을 내세울 수도 없으니 돈을 받아들기 전까지는 액수를 알 수 없다는 것. 식사문제에서도 보조출연자들은 사람이 제때 밥은 먹어야 할 것 아니냐고 하지만, 업체와 제작부는 그들만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니므로 설명도 없이 촬영을 강행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이해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렇더라도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어느 보조출연자의 분노는 모두가 공감할 만한 것이다. 그는 식사로 제공한 김밥 일부가 상해 있었던 모 기획사를 예로 들었다. 촬영현장에 음료수와 간식을 비치해두는 티테이블의 경우 보조출연 인원이 너무 많으면 제작부에서 기획사에 티테이블을 따로 둘 것을 요구한다.
경력자의 진로
보조출연을 오래 하다보면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스탭과도 안면을 익히게 된다. 대규모 인원이 오랫동안 함께 출연한 영화 <황산벌>에서는 일을 거들어주다 제작부처럼 되어버린 연기자가 있었고, 팀장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조출연을 통해 배우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때문에 연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팀장으로 일하며 현장에 남아 있던 어떤 배우 지망생은 회사를 그만두고 연기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당장 생계 때문에 보조출연을 하더라도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은 카메라에 얼굴이 잡히지 않도록 조심한다고 한다. 보조출연이나 재연 프로그램으로 얼굴이 팔린 사람은 배우로 기용하지 않는 것이 대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