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너무 많은 정보가 찰나에 지나가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다시 보아도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 매체다. 놓치고 지나갔던 누군가의 표정, 처음엔 보지 못했던 어느 구석의 그림자, 자신만의 존재감을 지닌 소품 하나. 그러나 영화를 몇번이고 다시 보면서도 배경처럼 흩어진 보조출연자들까지 눈여겨보기는 힘든 일이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그저 스치듯이 영화 속의 보조출연자도 그처럼 흘려보내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영화는 세상 최후의 날에 홀로 떨어진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멜로영화의 연인이 정담을 나누는 카페에서, 형사영화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거리에서, 그들은 어떻게 영화를 찍고 있었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몇몇 영화의 현장을 찾아 ‘보조출연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그들 한명 한명을 만났다.
새벽까지 잘 버티면, 9만원은 들어오려나어느 4년차 보조출연자 K의 하루
새벽 여섯시로 맞추어둔 자명종이 “하나, 둘, 셋, 일어나세요!”라며 금속성의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베개를 끌어안고 몸부림을 치던 K는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앉아 자명종을 끄고 멍한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시 오분. 여덟시까지는 논현역에 도착해야 하므로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괜찮다. 그가 등록해둔 네 군데 보조출연 업체 중 하나인 A기획사도 다른 회사처럼 펑크에 대비하여 보조출연자를 필요한 수보다 많이 불렀다가 선착순으로 떨어뜨리곤 했지만, 오늘 촬영은 경력이 되는 사람들로 아홉명만 부른다고 했다. 차비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모는 겪지 않을 터였다. K는 내키지 않는 몸을 잡아끌듯이 일으켜 양치질을 하고 면도를 하기 시작했다. 사극이어서 어차피 수염을 붙여야 하겠지만 가만히 있어도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질거리는 가짜 수염을 생각하면 면도라도 깨끗하게 해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촬영 시작 전 영화에 대한 설명을 경청하고 있는 보조출연자들
어제 아침에 밤샘 촬영이 끝나고 종일 낮잠을 자다가 새벽까지 잠을 설쳤더니 좀처럼 기운이 나질 않았다. 오늘도 철야라는데, 출연료는 제대로 나오려나. 그제는 오후부터 아침 일곱시까지 일하고 6만5천원을 받았다. 그 정도면 억울하지 않게 받은 셈이지만 날마다 그렇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1천만 관객, 1천만 관객, 떠들어대지만 그렇게 되고 나서 보조출연자들의 수입은 오히려 낮아졌다. 보조출연 업체가 많아지면서 영화사에는 단가를 낮게 부르고, 보조출연자에게는 온갖 핑계를 대며 출연료를 깎는 업체들이 난립하고 있는 탓이다. 자리가 모두 차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보조출연자에게는 차비라도 쥐어주는 것이 업계의 관행이었는데, 어떤 곳은 새벽 두시에 사람을 모아놓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지 않은가. 다행히 오늘 기획사는 일처리가 확실한 곳이다. K는 맡은 역할이 가벼운 바지저고리만 입어도 되는 상민이기를 바라며 벌써부터 뜨거워지는 햇살 아래 길을 나섰다.
수염 안 붙이는 ‘복면’ 역할 부럽네~
논현역 6번 출구 앞에는 벌써 동료 출연자 몇명이 와서 무가지를 바닥에 깔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낯이 익은 팀장에게 인사를 하면서 슬쩍 일지를 건네다보니 ‘복면’이 셋이고 ‘손님’이 여섯이다. 복면을 쓰는 역이라면 수염을 붙이지 않아도 좋겠지만, 눈치를 보니 그 역은 팔팔한 이십대 청년들의 몫인 듯했다. K는 삼십대 중반이다.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와 시작했던 장사에 실패를 보고, 다른 일거리를 찾기 전에 잠시만 하자 했던 일이지만, 어느새 3년을 넘기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초반에 만났던 아저씨들이 한탄했듯이 K도 보조출연에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다. 드라마는 잠시 앉아 있을 새도 없이 종종거려야 하지만 영화는 운만 좋으면 반나절을 놀면서 보낼 수도 있었고, 딱히 하는 일도 없어 업체에서 전화가 오는 대로 나가다 보니, 어느새 자기도 아저씨 나이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 주저앉는 건 아닐까. K는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꺼내며 시름에 잠겼다.
날이 밝아오는 가운데 마당에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보조출연자들
현장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보조출연자들끼리도 제법 친분이 쌓였지만 사람이란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와 어울리게 마련이었다. 이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아이들은 이른 아침에 피곤하지도 않은지 담벼락에 기대서서 서로 휴대폰 액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번 나갔던 현장 사진인가보다. K는 문득 궁금해졌다. 쟤들은 웬일로 사극에 다 나온 걸까? 영화계에서는 농한기라고 할 만한 한여름이어서 일거리가 떨어진 걸까. 20대와 30대 초반 보조출연자들은 일거리가 가장 많아 구태여 분장을 하고 겹겹이 옷을 껴입어야 하는 사극은 웬만해선 나오질 않는다. 그래서 TV 사극에서도 전쟁터 앞줄에서 뛰어가는 사람들은 젊은이를 쓰지만 눈에 띄지 않는 뒷자리 태반은 50, 60대로 메우곤 했다. “버스가 곧 도착한답니다!” K는 그새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소는 민속촌. 담배도 넉넉하게 사두었고, 요즘 읽고 있는 명상집도 챙겨넣었고, 얼음물과 수건도 준비했다. 이 정도면 가방 안이 알차다. K는 널찍한 촬영버스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기 위해 눈을 감았다.
처우 불만으로 소동부리다간 불평분자로 찍힌다구!
아침 나절이라 도로가 막히지 않았는지 버스는 야속하게도 40분 만에 민속촌에 도착했다. 지금부터는 화장실 한번 마음대로 갈 수 없을 것이다. K는 제대로 쉬지 못해 굳은 어깨를 두드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보조출연자 분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의상 먼저 갈아입고 분장합니다.” 잽싸게 제작부와 이야기를 마친 팀장이 담배 한대 피울 여유도 없이 재촉하자 K 또래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화장실 좀 다녀오자며 볼멘소리를 했다. 누군가 돌아보니 어디서 보았지 싶게 낯이 익었다. 한동안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눈에 설었나보다. 몇달 전 보조출연자들이 더운날 물도 주지 않고 부식도 스탭들과 너무 차이가 난다며 소동을 부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앞장서서 큰소리를 냈던 A였다. K는 반가운 마음에 눈인사를 건넸다. 요즘 대형 TV 사극이 많아 보조출연자 구하기가 어렵다더니 덕분에 일을 다시 시작한 건가. 이바닥에서 한번 불평분자로 찍히면 한동안은 일을 얻기가 힘들었다. 누가 선동을 한다더라, 소문이 돌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새벽같이 대전에 내려갔던 보조출연자들이 아침밥을 주기는커녕 제대로 줄을 서지 않는다며 방금 도착한 사람들을 이리저리 함부로 잡아끌며 험한 말을 하는 스탭들에게 화가 나서 타고 내려간 버스를 그대로 타고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돈을 모아 버스 대절료를 만들어서. 아마 그때 목소리가 가장 컸던 보조출연자도 지금쯤 하는 일 없이 놀고 있지 않을까.
<몽정기2>의 교실장면. 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보조출연자들이다.
몇몇은 화장실에 가고 남은 사람들은 우선 의상팀이 색깔 맞춰 주는 대로 바지저고리를 받아 버스 안에서 갈아입기 시작했다. 짚신 앞코 사이로 발가락이 삐져나와 다른 사이즈는 없는지 묻는 K에게 “다 거기서 거기에요”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서 거기는, 무슨. K는 투덜거리면서 스스로 발에 맞는 짚신을 찾아 신었다. 그래도 영화 현장에서는 보조출연자를 인간대우해주는 편이다. 어떤 드라마 반장은 어르신들에게 야자를 일삼는 것은 물론이고 대놓고 “너네는 움직이는 소품”이라고 못할 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영화쪽은 팀장도 정중한 편이고, 스탭들도 너무 힘들지만 않으면 사람을 막 대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제 촬영을 시작한 영화여서 그런지 옷도 깨끗하니 마음에 든다. 한여름 TV 사극 현장에 갔던 K는 빨래를 하지 않아 땀과 흙먼지로 풀먹인 것처럼 굳어 있는 의상을 받아들고 어이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문제다. 먼지 묻고 구겨진다며 바닥에 앉지도 못하게 하니까. 이래저래 K는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선호하게 됐다.
휴대폰을 말아올린 저고리 소매 사이에 집어넣거나 허리끈으로 바지춤에 묶은 K와 동료들은 팀장을 따라 분장을 하러 갔다. 상투가 달린 망건은 그대로 뒤집어쓰면 되지만 수염이 고역이다. 종일 수염을 붙인 채 밥까지 먹을 생각을 하니 한칸이라도 줄 뒤로 가고 싶다. 복면 친구들이 부럽지만 움직임이 많아 난이도가 높은 역이라고 한다. 아침부터 자명종처럼 요란하게 공기를 찢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보조출연자들은 잡담을 시작했다. 책도 읽고 문자도 보내고 휴대폰 게임도 하면서 대기 시간을 보내지만 역시 보조출연자의 가장 좋은 친구는 잡담이다. A가 재미있게 생긴 B에게 농담을 걸었다.
“요즘 홈쇼핑 진짜 많이 나오던데? 돈 좀 벌겠어?”
“그 얘기만 나오면 쪽팔린다니까. 그거 다 재방송이에요.”
“근데, 공기 넣는 그거, 진짜 트럭이 지나가도 안 터지나?”
“에이, 터져요. 내가 보는 데서도 트럭 지나갔는데, 바로 터지더라고.”
출연료 일당체계
보조출연료는 이동시간을 포함하여 12시간에 3만원이 기본이다. 드라마는 3만5천∼3만6천원을 지급하지만 영화와 달리 식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식비가 포함된 액수다. 주간 촬영이 끝나는 기본 시간은 하절기가 오후 7시고 동절기가 오후 6시. 열두 시간이 되지 않아 촬영이 끝나더라도 기본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요즘은 많이 흔들리고 있다. 기본 시간이 넘어 촬영이 끝나면 연장 수당이 지급되지만 애매한 경우가 있다. 8월 주간 촬영이 오후 7시40분에 끝나면 제작사와 기획사에 따라 연장 수당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수당을 협상하는 팀장의 능력이다. 어떤 기획사는 집합시간과 연장 수당 지급 기준을 세분하여 명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장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보조출연 업체는 제작사로부터 4만원을 받아 1만원을 떼어 회사 몫으로 하는데, 경쟁이 치열해 3만8천원을 가격으로 제시했다고 해도, 굳건하게 정착돼 있는 기본급 3만원을 깎기는 어렵다. 대신 모자란 2천원을 메우기 위해 보조출연자들의 연장 수당을 깎는 편법을 쓰기도 한다. 여기에 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야간촬영을 하면 곱절의 수당이 적용된다. 오후에 집결하여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찍으면 6만원을 받게 되는 식이다. 새벽 4시나 자정처럼 대중교통이 없을 경우에 집합하거나 해산하면 5천∼1만원 정도 택시비가 추가된다. 그러나 이것도 기획사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밤 11시처럼 대중교통 일부만 이용 가능한 시간에는 차비를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식비도 예민한 문제다. 영화의 기본 보조출연료는 식비를 제외한 액수이기 때문에 식사로 2천원 상당의 김밥 한줄이 제공된다면 나머지 식비 3천원 정도가 증발하는 것이다. 모 기획사의 경우 현장 사정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부실한 식사를 제공하는 경우 1천, 2천원이라도 추가 수당을 지급하지만 모든 회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 위험수당과 세탁비도 애매해지는 경우의 하나다. 대중목욕탕처럼 노출이 있는 촬영, 보조출연자가 직접 준비한 의상이 가짜 피 등으로 더러워지는 현대극 촬영, 한겨울에 해수욕장을 찍는 것처럼 정도 이상으로 힘든 촬영 등은 추가수당을 지급해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 액수가 달라지고 심지어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출연료 지급방식은 영화의 경우 현금정산이 기본. 촬영이 끝나고 그날 촬영분에 해당하는 출연료를 받게 된다. 보조출연자도 고정출연을 하는 경우가 많은 드라마는 월급제나 주급제로 정산하기도 한다.
보조출연 인솔 팀장
보조출연자를 인솔하는 이를 영화 현장에선 팀장이라 부르고 TV현장에선 반장이라 부른다. 팀장은 보조출연 업체에 바로 직원으로 입사한 사람도 있고 보조출연을 오래하던 사람이 하기도 한다. 보조출연자의 위치와 동선을 알려주고, 많게는 수백명에 달하는 보조출연자들을 통제하고, 출연료 정산까지 하는 것이 팀장의 역할. 팀장은 이처럼 제작진과 보조출연자 사이에 있기 때문에 양쪽 모두의 원성이나 오해를 사기도 하고 양면성을 보이기도 한다. 어떤 TV사극을 맡았던 반장이 그 예다. 평소 성격이 나쁘기로 이름났던 그는 시체로 누워 있는 보조출연자들을 소품 대하듯 발로 툭툭 차면서 자세를 고치라고 말해 욕을 먹었지만, 보조출연자 한명이 바다에 빠지자 옷을 입은 채로 뛰어들어 구해냈다고 한다. 팀장은 보조출연자들의 연기의 질과도 직결된다. 경험 많고 능력있는 팀장이 영화를 맡았는지, 관객은 몰라도 전문가는 그 차이를 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