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은 두 남자의 매력 속으로
누구나 소심함 하나쯤은 갖고 있다. 이 소심함이라는 유전자는 꼭 결정적인 순간에만 발동해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인간이 난처한 상황을 맞아 더욱 소심해지는 그 순간을 지켜볼 때면 터져나오는 웃음. 그것이 결코 비웃음이 아님을, 그것이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이끌어냄을 영화 속 김주혁과 휴 그랜트는 제대로 보여준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느 순간 손을 뻗어 그들을 도닥이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데이비드 캐시디의 말을 빌리자면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아아. 아뇨 물론 안 될 일이죠. 내가 바보란 것 알죠?… 분명히 말하려고 오랫동안 연습했어요. 휴, 말했다는 거 자체가 중요하죠(주저리주저리).”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찰스)
“(짝사랑하던 윤경과 키스하기 위해 다가서다가) 메리 크리스마스!”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
김주혁: 김주혁은 의외로 소심한 남자다. <광식이 동생 광태> 속 광식에게 많은 이들이 공감을 보내줬지만 그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바보죠.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어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촬영 며칠 뒤 후회가 되더라고요. 아무리 잘해도 이건 ‘소심남’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나. 이 남자는 심지어 술도 마시지 못한다. 하지만 소심한 이 남자 ‘후배들에게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술값에 만만치 않은 돈을 쏟는다. “아무리 CF를 많이 해도 돈이 모이질 않네요”라고 너스레를 떠는 이 소심남을 과연 누가 미워하겠는가!
휴 그랜트: 툭하면 말을 더듬고, 눈을 껌벅이는 그는 매우 어수룩해 보인다. 처진 눈이 부여한 우유부단함이라는 숙명은 그를 매우 소심한 인물로 몰고 간다. 하지만 현실 속 그는 매우 다른 사람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그는 오히려 빠른 머리회전과 위트를 내비치는 조크를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다. 언론의 비난에 딴청을 피우고, 칭찬에 김을 빼는 일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마이클 케인이 자신의 눈 깜박임에 대해 지적하자 휴 그랜트는 “그는 눈 안 깜박거리는 것에 대단히 집착한다. 맞는 말이다. 그건 내가 신을 별로 편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주로 나타나는 증세다”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는 질문에 다시 대수롭지 않게 “뭐, 대개 신 구상을 다시 해야 한다. (웃음) 대본을 고쳐 쓰거나 연기를 재고하거나 하는 식으로”라고 답하는 그는 결코 소심하지 않다. 몇 가지 인간적인 허점이 있는 남자라면 몰라도.
나사 하나가 풀린 듯한 이 남자들에게도 필살기는 있었으니, 이름하여 ‘능청스러움’. 이들의 ‘느끼하고 썰렁하고 유치한데다가 엉큼함’은 때론 이런 능청스러운 언변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이들이 걸어오는 제안은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덜하다. 단호하게 ‘No’라고 해도 이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으리란 이상한 믿음이 있어서다.
“그래서 밥 살 거예요, 말 거예요? 아, 그쪽이 싫으면 내가 사고.” (<싱글즈> 수헌)
“정말 순수하게 음흉한 짓 안 하고, 섹스만 하자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 다니엘 클리버)
휴 그랜트: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이지만, 어쩐지 부담스런 지성을 찾아보긴 힘들다. 이는 확고한 자기 주장을 상대에게 강요할 위험도 없다는 말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속 다니엘 클리버는 늘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도움을 준다. 그는 친절을 베푸는 것을 꺼리지 않지만 ‘유어웰컴’이라는 감사 인사를 반드시 들어야겠다는 생각도 없다. 진짜 휴 그랜트도 사실 그렇다. 휴 그랜트는 비난을 하면 딴청을 피우고, 칭찬을 하면 김을 뺀다. 그는 자신이 “매우 게으르고, 무심한 사람”이어서라고 설명하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만의 쿨함으로 비친다. 21세기에 쿨하다는 것은 최고의 칭찬 아닌가.
김주혁: <싱글즈>에서 수헌은 잘나가는 증권회사 직원이지만 나난(장진영)에게는 한없이 따뜻하다. 하지만 현실 속 김주혁은 수헌만큼의 능청스러움은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은 “거절당하는 걸 공포 수준으로 두려워한다”고 했다. 하여 그는 “영화 속 광식이처럼 ‘오빤 좋은 사람이에요’라는 말도 들어봤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먼저 마음을 고백하지도 못하는 편”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그는 ‘능청’보다는 ‘소심’한 쪽 유전자가 더 많은 쪽이었다.
장동건이 혹은 브래드 피트가 이상형의 여자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 (화장을 안 해도) 너무 예쁜 시바사키 고(<메종 드 히미코>)가 안 예쁘다고 핀잔받는 모습. 사실 이들 장면은 너무 설득력이 없지 않나. 어떤 여자가 아름다운 그들의 프러포즈를 거절할 수 있으며, (게이가 아니고서야) 어떤 남자가 화장을 안 해도 예쁜 여자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름다운 사람들이 오히려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아름다움을 가진 데 따른 당연한 대가일지 모른다. 만약 당신이라면 아름다움과 친근함 중 어떤 것을 고르겠는가. 김주혁과 휴 그랜트는 친근함이라고 답한다.
“당신과 있음, 전 정말 난처해져요. 당신의 잘못된 성격은 차치하고라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경험이 없는 제 가슴은, 다시 버려진다면 회복되지 못할까봐 두려운 거죠. 그게 예상이 되고. 사진이나 영화는 도처에 있잖아요. 당신은 갈 거고 전 아마 맥빠지겠죠.” (<노팅힐> 윌리엄)
“넌 내가 좋아, 하늘이 좋아? 난 네가 있는 땅이 좋아!” (<청연> 지혁)
김주혁과 휴 그랜트: 김주혁과 휴 그랜트는 매우 축복받은 이들이다. 적당히 잘생겼고, 적당히 문제가 있는 이들의 마스크는 능청스럽고, 소심하며, 느끼하고, 유치하고, 소심한 캐릭터 어느 것과도 절묘히 어울리기 때문이다. 어수룩해 보이는 말투와 행동은 그들 앞에 선 우리를 무장해제시킨다. 때문에 우리는 휴 그랜트가 눈을 껌벅이면 단번에 그가 당황했음을 눈치챈다. 김주혁이 말을 더듬으면 그가 속마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내뱉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사실 이들은 자신의 외모가 가진 영향력을 너무도 적절히 활용한, 절대 어수룩하지 않은 배우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고.
김주혁 vs 휴 그랜트 명장면 Best 3
김주혁
김주혁의 베스트 장면에는 딱히 대화가 필요없다. 그는 한정된 표정과 몸짓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관객은 별 어려움 없이 그가 숨겨둔 행간의 의미까지 파악해낸다.
1. 프러포즈
저 멀리 그녀가 옵니다. 나는 꽃다발을 들고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했지요. 하지만 그녀가 눈앞에 다가온 순간 용기가 눈 녹듯 사라져버렸습니다. 꽃다발은 하늘로, 나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당시 광식의 마음은 이랬겠지? 아휴, 바보. “여자는 짐작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데” 말이지.
2. 황당 시추에이션 속에서 더욱 빛나는 매력
멋진 척 쿨한 척 여자친구와 작별하는 순간. 나난(장진영)은 공항에 가는 수헌을 몸소 태워다준다. 한데 이 여자, ‘장롱면허’였던 게다. 공항에 가기도 전에 목숨이 끊기는 건 아닌지, 수헌 얼굴에 긴장이 가득하다. 소심한 김주혁의 매력은 바로 이 표정에 있다.
3. 스킨십
겉으로는 터프한 척 센 척해도 홍반장은 “이상하게 내가 사랑하기만 하면 모두가 떠나버리더라. 난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데”라고 주절거리는 소심남이다. 당연히 키스에서도 수동적이다.
휴 그랜트
휴 그랜트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꿈벅이는 눈과 어벙한 표정과 말투, 그에 버금가는 우유부단함에 있다. 때문에 그의 명장면은 대사와 함께 봐야 제 맛이다.
1. 프러포즈
찰스: (찰스의 결혼서약에 이의를 제기한 동생의 수화를 해석하며) 동생이 ‘신랑이 망설이는 것 같습니다. … 신랑은 다른 여자를 사랑합니다.’라고 합니다.
성당에서 아홉번이나 ‘F***!’이라고 외치면서도 결국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이 우유부단한 찰스. 동생이 없다면, 제대로 사랑이나 하겠수?
2. 황당 시추에이션 속에서 더욱 빛나는 매력
윌리엄: 영화 속에 말을 등장시킬 의향은 없으셨나요?
안나: 아, 의향은 있었지만, 배경이 우주공간이라서요.
톱스타 안나(줄리아 로버츠)를 만나 <경마와 사냥> 기자를 사칭하게 된 그가 관계자 앞에서 나눈 이 황당한 질문은 휴 그랜트의 매력을 가장 제대로 보여준 시퀀스다.
3. 스킨십
다니엘: 세상에 엄청 큰 고쟁이네. 맘에 드니까 사과하지마. 할머니 안녕?
로맨틱한 첫 스킨십의 순간, 이처럼 말 많은 남자가 어디 있을까? 아니 그런데, 왜 말이 많아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