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V의 공헌 중 하나는, 세계의 재능있는 애니메이터들에게 활동의 장을 열어준 것이다. MTV는 자신의 로고를 이용한 애니메이션을 전세계의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에게 의뢰했다. 그리고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방영할 단편애니메이션을 작가들에게 부탁했다. 빌 플림턴 역시 MTV의 수혜자 중 하나였다. 점잖게 생긴 중년의 남자 두 사람이 나온다. 정장을 쫙 빼입은 이 신사들은 그러나, 고상하게 덕담을 주고받지 않는다. 서로 얼굴을 때리거나 할퀴는 것 정도로도 성이 차지 않는다. 입을 크게 벌리고 대포를 쏘거나, 혀와 눈알을 빼거나, 입 속으로 개와 고양이 그리고 쥐까지 집어넣고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엄청난 수난을 당하고도 태연하게 제 모습으로 되돌아와서는 상대방에게 복수를 한다. MTV에서는 오고가는 복수전을 한번씩만 보여주었지만, 그것들을 한데 모은 단편 <되로 주고 말로 받기>에서는 마침내 어깨를 부둥켜안고 함께 걸어간다. 그만큼 서로에게 복수를 했으니 이제는 사이좋게 지내자, 라고 정겨운 대화라도 나누듯이.
상식적인 사회를 ‘쪼는’ 엽기
빌 플림턴의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다. 요즘을 ‘엽기의 시대’라고 흔히 말하는데, 이미 플림턴의 만화는 ‘엽기’ 그 자체였다. 라는 작품을 보자. 한 남자가 레스토랑에 들어온다. 홀로 음식을 시키더니 테이블에 놓인 스파게티를 여인의 모습으로 상상한다. 남녀가 들어온다. 여자가 마구 떠들어대자 남자는 그녀를 이상한 모습으로, 갖가지 동물과 사물로 상상한다. 여자의 입에서 파편이 마구 튀어 남자의 얼굴을 덮자, 웨이터가 달려와 삭삭 긁어내 접시에 담는다. 부부와 아이 둘이 들어온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자 상상의 공간이 펼쳐진다. 햄버거 탱크가 포격을 하고, 피자 비행기가 공중을 날며 기관총을 갈겨댄다. 각자의 상상 속에서 기묘한 상황이 한참 전개된 뒤, 여자와 같이 들어온 남자가 계산서를 요구한다.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보고 화를 내자 웨이트리스가 남자의 배를 갈긴다. 갑자기 X레이처럼 뱃속에서 음식물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남자가 토할 것만 같다. 주인이 달려와 황급히 입을 틀어막지만 어쩔 수 없다. 웨이트리스는 터져나오는 토사물에서 음식의 종류를 세고 있고, 주인은 그걸 다시 남자의 입에 쓸어넣는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토하기 시작하고, 레스토랑은 토사물의 바다가 된다. 어처구니없는 상상력이지만, 빌 플림턴은 놀랍게도 이 작품을 아카데미상을 노리고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카데미상용으로 아름다운 레스토랑에서 개개인들의 작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사랑스러운 작품을 원했다. 그러나 막상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니까 미친 생각들이 자꾸 떠오르며 내 손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는 아카데미상은 빗겨갔지만, 대신 요즘의 시대정신에 딱 들어맞는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빌 플림턴의 애니메이션은 ‘엽기적’이다. 이 말말고는 딱히 떠오르지가 않는다. 인체의 한 부분을 극도로 과장하고 왜곡시킨다거나, 툭툭 잘라버리는 광경이 수없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특별하게 혐오스럽지 않다. 빌 플림턴은 자신의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는 폭력이 ‘버스터 키튼, 막스 형제, 스리 스투지스 등 전설적인 코미디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들의 폭력은 즐거움을 주는 도구였고, 동시에 상식적인 사회를 ‘쪼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작품을 ‘마이크로툰즈’라고 해설하는 것처럼 빌 플림턴의 만화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재구성한다. 빌 플림턴은 자신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풍자보다는 코미디’라고 답하지만, 그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뒤틀림과 과장 자체가 답답하고 경직된 사회에 숨 쉴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디즈니? 필요없어!
빌 플림턴은 ‘엽기’에 어울리지 않게, 꽤 나이가 많다. 1946년 4월30일, 미국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서 태어났으니까 이제 56살이다. 환갑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그의 만화는 더없이 젊은 감각을 지니고 있다. 3남3녀의 복작스러운 환경에서 성장한 빌 플림턴은 일찌감치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뜻을 두고 있었다. 수시로 비가 내려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오리건주의 변덕스런 기후도 한몫했다. 어릴 때 큰 영향을 받은 작품은 디즈니가 아니라, 워너의 <대피 덕>과 <벅스 바니>. 그때부터 ‘꼬인’ 만화를 좋아했던 것이다. 12살에는 친구들의 선거포스터를 그려주다가 학교에서 에로만화가라고 불리고, 14살에는 디즈니에 그림을 보냈다가 너무 어리다고 정중하게 거절당했다. 나중에 빌 플림턴이 조금 유명해지자 디즈니에서 제안을 했지만, 이번에는 플림턴이 거절했다. 계약서를 훑어보니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점과 더 나쁜 점’만 있었다는 게 이유. 베트남전쟁을 피하기 위해 주 방위군에 들어갔던 빌 플림턴은 68년 만화가의 꿈을 안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노점상으로 나서기도 했지만, 추운 겨울 뉴욕의 거리에서 단 하나도 팔지 못하고 쓸쓸한 날을 보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빌 플림턴은 <뉴욕타임스> <보그> <빌리지 보이스> 등에 일러스트를,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롤링 스톤> 등에 만화를 그리면서 유명해진다.
어린 시절 빌 플림턴의 꿈은 애니메이터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은 일러스트레이터와 만화가를 거친 뒤 비로소 이루어진다. 빌 플림턴은 <붐 타운> 등 단편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다가 87년작 <당신의 얼굴>이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 부분 후보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작업에 뛰어든다. <그 날들 중 언젠가> <키스하는 법> <담배를 끊는 25가지 방법> 등의 단편을 만들었고, 92년에는 어린 시절부터 소원이었던 장편애니메이션 <튠>을 만든다. 47분 안에 히트곡을 쓰지 않으면 일과 애인을 잃게 되는 작곡가를 그린 작품이다. <튠>을 만든 뒤에는 애니메이션으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사로 을 찍었다. 말하는 개를 만난 어설픈 변호사가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는 내용인데, 실사로 찍은 뒤 개와 사람의 입을 그려넣는 등 여러 가지 실험도 했다.
홀로 일으킨 ‘플림턴 월드’
빌 플림턴은 철저한 ‘독립’애니메이션 작가다. 그는 모든 것을 혼자서 한다. <튠>을 만들 때에는 혼자 백그라운드, 스토리보드, 각본, 프로듀서, 애니메이션, 레이아웃 등을 다 했다. 물론 그림도 모두 혼자서 그렸다. “하루 300장 정도 그리니까, 3천장이면 열흘 정도. 짧은 것은 몇달이면 가능하다. 70분짜리 장편도 혼자 1년 반이면 된다.” 이런 식으로 무모하게 작업을 했다. 다행히 빌 플림턴은 무척 작업속도가 빠른 편이고,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부터는 어시스턴트와 함께 작업하고 있다. 혼자 작업을 했던 주된 이유는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빌 플림턴은 그림 그리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빌 플림턴은 일단 그림을 그린 뒤 초광각렌즈로 촬영하고, 그 흑백사진 위에 수성물감으로 채색을 한다고 한다. 빌 플림턴은 채색하는 과정은 그림 그리는 것보다 재미가 없다고 한다. 그냥 ‘쉬는 시간’이다.
빌 플림턴은 욕심이 많고,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관장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돈에는 욕심이 별로 없다.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2>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나온 <몬도 플림턴>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적자다. 빌 플림턴은 단편에서 돈을 벌고, 장편으로 까먹는 일을 되풀이해왔다. 빌 플림턴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다. 마이크로소프트, AT&T 등 독점기업이나 일본의 공익광고 등 상업적인 작품들에서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장황하게 펼쳐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엽기성’이 그런 대중적인 작품들에서는 오히려 ‘유쾌한 상상력’으로 전화된다는 것이다. 빌 플림턴의 특기 중 하나는 가만히 있는 사람이나 사물이 천변만화하는 장면이다. 동식물이 물론 온갖 사물이나 상상으로 변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앉아서 이상한 세계를 여행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약간 순화시킨 빌 플림턴의 광고를 보면, 그의 상상력이 단순한 ‘엽기’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빌 플림턴은 애니메이션을 이용하여 고루한 사회를 조롱한다. <뮤턴트 에일리언>에서 얼이 죽을 때 프루벌 박사는 “넌 부자가 될 수 있었는데”라고 말한다. 그러자 얼은 “당신은 사람이 될 수도 있었지”라고 답한다. 빌 플림턴의 모든 애니메이션은 그 간단한 대사를 이야기로 길게 늘인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탐욕과 권력의 남용에 관한 것’이라는 빌 플림턴의 말처럼, 그의 애니메이션은 군부와 독점기업,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추한 군상을 질타한다. 단편들이 노래나 시처럼 은유적으로 공격을 한다면, 구체적인 사건들이 벌어지는 장편에서는 노골적으로 그들의 몸을 자르거나 분해하거나 갈아버리면서 딱딱한 사회를 뒤집어버린다. “인간의 몸은 아주 재미있는 것이다. 거기서 코미디를 찾아낼 수 있다.” <뮤턴트 에일리언>의 ‘외계인’들은 인간이 우주에 보낸 실험용 동물이었다. 동물들은 자신의 ‘몸’을 변형시키면서 어떤 힘을 가지게 된다. 그들이 ‘힘’을 가지고 돌아오자 권력자들은 기겁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들의 힘을 아주 좋은, 아주 즐거운 일에 사용한다. 빌 플림턴의 애니메이션에도 그런 힘이 있다. “난 미국도 좋아하고 여성도 좋아한다. 난 그저 권력의 남용을 희화화하고 싶을 뿐이다. 탐욕, 결탁, 관료사회 뭐 그런 것들”이라고 태연하게 말하지만, 빌 플림턴의 애니메이션은 강력하다. 시각적 충격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곱씹어보게 한다.
그것은 빌 플림턴이 ‘자유, 사랑, 평화, 사이키텔릭’의 60년대에 사춘기를 보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빌 플림턴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에는 60년대의 전통이 살아 있다. 섹스와 폭력, 과장된 신체와 극단적인 충돌이 삐딱하게 표현되고 원초적인 본성을 공격적으로 드러낸다. 진지하면서도 심각함을 강요하지 않고, 현실적이면서도 엽기적인 풍경으로 치환하는 탁월한 상상력의 빌 플림턴이 21세기에 더욱 각광받는 이유는 그것이다. 빌 플림턴은 과거의 유산과 미래의 비전을 함께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다.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의 첫 머리에 “교양있는 척하는 사람은 다 쏴버리고 싶다”는 말이 나온다. 빌 플림턴은 썩어 있는, 고여 있는 ‘교양’을 혐오한다. <현인>이라는 단편에는, 쉴새없이 바뀌는 머리를 가진 현인이 나온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능히 세상의 보석만이 아니라 쓰레기까지도 모두 담아내고, 또 흘려보낼 것이다. 가벼운 ‘엽기의 시대’에 빌 플림턴을 만나는 것은, 바로 그런 현인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김봉석 기자 lotu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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