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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찬 감독이 말하는 <소름>
2001-08-10

“일상의 공포를 가감없이 그리고 싶었다”

내러티브 전략 이야기가 통상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거나 단선적인 것이 아니다. 스릴러에서 흔히 복선구조를 차용하지만 <소름>이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어떤 한 사람이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친절히 안내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스스로 찾아가는 구조다. 관객 입장에서 약간 답답하게 느껴지더라도 조금 새롭게 접근하고 싶었다. 얘기 자체는 단순한데 안내자 없이 끌고 갈 때 생기는 매력이 있다. 친절한 안내자를 붙이면 이해하긴 쉽지만 영화의 무게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를 10번 이상 고치면서 그런 시도도 해봤다. 기존 방식은 전지적 시점이나 내레이션 같은 걸 도입하는 식일 것이다. 주관적 시점으로 진행되면서 관객이 해석할 스페이스를 주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결국 누군가 안내자가 되고 탐정이 되면 통째로 망가질 위험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공포 현실에서 느끼는 기운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싶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름끼치는 순간들이 있다. 혼자 있다가 누군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사소한 소음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기도 하고. 사운드를 과장해서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낡은 아파트에서 일상으로 접하는 소리를 담으려 했다.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는 건 은수의 꿈장면 정도다. 그 장면도 주의를 집중시킬 만한 오싹함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롱테이크 원신원컷이 많은 영화지만 흔히 말하는 롱테이크영화로 찍지는 않았다. 일단 롱테이크로 시작하면 클로즈업을 안 쓰는 영화가 대부분이지만 <소름>에는 극단적인 클로즈업도 자주 나온다. 후반 2번의 롱테이크는 연못과 여관인데 둘다 찍는 데 이틀씩 걸린 힘든 촬영이었다. 연못에는 2개의 다리를 지었다. 하나는 두 배우가 움직이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라가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캄캄한 밤중에 둘이 이야기하는 장면이라 조명설치부터 쉽지 않았다. 연못, 밤, 술취한 두 남녀, 이상한 분위기 등 복합적인 걸 하나의 테이크에 담으려 했다. 카메라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인다. 여기서 등장인물들은 신경이 극대치로 날카로워지는데 그런 긴장을 끌어가는 데는 하나의 긴 테이크가 낫다고 판단했다. 여관에서 선영을 죽이는 장면은 용현의 어리석은 판단과 오해가 살의로 전환되는 걸 보여줘야 했다. 둘 다 끝까지 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연못에서 이미 겁주는 얘기를 들었는데 선영은 용현을 따라 여관에 간다. 보통 여자라면 그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여관까지 따라가고 대들고 그러지 않을 텐데, 선영을 아주 강한 여자로 그리고 싶었다. 여관장면을 찍는데 첫날 세트에서 리허설만 6시간 넘게 했다. 한번 카메라가 돌면 7분 정도 진행되는데 한번 하고나면 배우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하루종일 같은 장면을 찍고 다시 찍고 하다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촬영 전에 배우들에게 이 장면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적 있다. 이 장면을 소화해내면 배우로서 인생을 다시 자리매김하게 될 거라는. 두 배우가 밤새 다시 연습하고 다음날 촬영에 임했다. 다음날도 여러 차례 다시 찍었지만 어느 순간 ‘이젠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명민·장진영 두 배우 모두 연기경험이 많지 않아서 힘든 게 있었다. 30% 정도 찍을 때까지 감을 못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뒤로는 달라졌다. 장진영과 김명민은 상반된 배우였다. 장진영은 정확히 CF모델 같은 배우여서 텅 빈 상태였다. 그래서 뭔가 채워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김명민은 TV연기 스타일이 굳어 있었다. 장진영에게 채워넣은 것과 달리 김명민에겐 계속 빼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처음 촬영할 때부터 두 배우에게 경쟁을 시켰다. “아마 영화 끝나면 둘 중 한 사람만 주목받을 것이다. 그게 누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각자 자기 하기에 달렸다”고. 두 배우에게 가혹한 감이 없지 않지만 찍을 때 냉정하고 잔인하게 찍어도 그 결과가 잘 나오면 보상받게 된다. 찍을 때 호형호제해봐야 결과가 엉망이면 관계가 좋아질 리 없는 거 아닌가. 그게 프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리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거나 하는 일은 안 했다. 그런 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용현과 선영의 사랑 만남과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두 배우에겐 둘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500년 동안 빠져나갈 수 없는 캄캄한 동굴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면 어떻게 될까? 별도리 없이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관계라면 ‘나, 잡아봐라’ 하는 식의 사랑표현이 필요없을 것이다. 건조하게 갈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실사조명 카메라는 우리 눈보다 화사하게 찍을 수도 있고 배경을 지울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찍어보고 싶었다. 어두운 이야기를 어둡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실사조명을 택했다. 현실에 없는 빛을 만들어서 찍는 건 피했다. 이런 실사조명은 일반영화에서 하는 방식이 아니다. 광량을 훨씬 많이 주고 조리개는 조여서 찍어야 한다. 촬영하는 사람들은 이런 조명에 거부감이 있다. 실제로 뭐가 뭔지 모르게 찍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테스트촬영을 통해 촬영, 조명감독에게 이렇게 찍어도 되겠구나 하는 확신을 줬다. 키라이트 없이 간접조명을 많이 써서 조명시간이 다른 영화보다 2배 이상 들었다. 10시간 찍으면서 조명설치하는 데 6시간이 걸리니까 효율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런 실사조명이 <대부>를 통해 효과를 봤다. <대부>를 보면 빛이 들어오는 부분은 전부 화면 안에 있는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다. 콘트라스트를 살리지 못할 위험이 있지만 <대부>는 그걸 완벽히 해냈다. 그 정도로 할 만한 자본이나 기술이 없었지만 우리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실사조명을 시도했다.

클리셰(관습적 표현) 클리셰가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클리셰 자체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연결해서 새롭게 보여주느냐가 아닐까. 예전에 어떤 교수가 클리셰만 확실히 담아내도 리얼리티 있는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말을 했는데 맞는 말인 거 같다. 클리셰를 일부러 배제하고 찍지는 않았다. 그게 리얼리티를 담보한다면, 다르게 보일 가능성이 있다면 그냥 찍었다. 클리셰란 것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걸로 보일 수 있다.

좋아하는 감독 처음 영화를 좋아할 무렵엔 앨런 파커의 <월> 같은 영화를 보고 감동받았다. 하지만 감독의 시선으로 영화를 접하면서 호감을 갖은 두 사람은 데이비드 린치와 라스 폰 트리에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처럼 다른 누구도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있지만 동시대성을 생각할 때 데이비드 린치와 라스 폰 트리에가 와닿는다.

다음 영화 원래 데뷔작으로 준비했던 <수호전>을 비롯해서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지만 아직 결정한 건 없다. 이야기와 캐릭터를 넓게 포진시키고 다뤄보고 싶다. 기왕 시작한 일이라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데뷔작으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다뤄보고 싶다. 둘다 극단적으로 거칠고 강한 톤의 영화가 될 테지만 <소름>처럼 암울한 영화만 계속 찍겠다는 생각은 없다.

▶ 2001 한국영화의 발견, <소름>

▶ 윤종찬 감독이 말하는 <소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