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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 숙봉의 외길 인생
2001-08-03

5만2300여편의 영화, 그리고…

1980년 영화평론가 돔 숙봉은 타이영화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된 프린트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사를 연구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듬해부터 필름 아카이브 설립 운동을 시작하였다. 초창기에는 정부로부터도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였고, 언론을 통해 겨우 모금운동을 펼치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민의 후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부를 끌어들일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우연히 1897년 유럽을 방문하였던 출랄롱코른 왕의 모습이 담긴 필름이 스웨덴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침 1983년 스웨덴 필름 아카이브 주최로 열린 세계 필름 아카이브 연맹 총회에 참가하여 스웨덴 필름 아카이브가 보관하고 있던 그 문제의 필름을 찾아내기에 이르른다. 타이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영주로 꼽히는 출랄롱코른 왕(<왕과 나>의 황태자가 바로 어린 시절의 그이다)에 대한 타이 국민들의 존경심은 대단한데, 바로 그 왕의 모습이 담긴 필름을 찾아냈다는 소식은 왕실은 물론 전 국민을 흥분시키는 일대 사건이었다. 결국 교육성에서 돔을 만났고, 돔은 필름 아카이브의 필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1984년 타이 필름 아카이브가 설립됐다. 하지만 첫 출발은 독립기구가 아닌 국립 박물관의 한 부서로서였다. 1987년 독립기구로 분리되기는 하였지만, 1991년까지도 타이 필름 아카이브에서의 그의 신분은 임시직이었다. 정부의 재정지원도 매우 열악하여 현재도 전체 약 25명의 직원 가운데 5명 정도만이 정규직원이다. 그러나 비록 그가 타이 필름 아카이브에서 공식적으로는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영화인들과 시민들은 그를 타이 필름 아카이브의 상징처럼 여기고 있다.

그의 타이영화의 보존과 복원에 대한 집념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데, 이를테면 그가 1987년 펼친 ‘타이영화 찾기 운동’은 타이영화사의 복원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이 운동으로 타이 필름 아카이브는 국내외로부터 400편이 넘는 프린트를 찾아냈고, 현재는 약 5만2300여편의 프린트를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타이에서 영화는 여전히 주류문화권에서 벗어나 있었고, 돔은 대중에게 영화문화에 대한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돔은 타이 필름 파운데이션의 설립목적을 세 가지로 설정하였다. 첫째 타이영화사 연구의 지원, 둘째 지식인사회의 영화에 대한 인식 전환, 셋째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독립영화의 지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목표하에 계간지 발간, 영화강좌 개설, 타이 단편영화와 비디오 페스티벌(TSFVF) 등의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돔 숙봉은 대학 시절 감독을 꿈꿨고, 실제로 유타나 묵다사니트 감독과 작업을 같이한 적도 있다. 하지만 졸업 뒤 그가 택한 영화평론가, 영화운동가의 길은 결과적으로 한명의 감독을 잃었지만 수백 수천의 감독을 역사에 남기는 선구자를 탄생시킨 의미있는 길이었다.

▶ “타이영화가 온다

▶ 돔 숙봉의 외길 인생

▶ <낭낙> <잔다라> 감독 논지 니미부트르

▶ 실험영화 위해 ‘킥 더 머신’ 설립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 2001 하반기 타이영화 기대작

▶ 국내 개봉 앞둔 타이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