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TV의 시대는 TV를 '보는'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는 '채널을 돌리는 시대'이다. 나는 오늘도 TV를 본다. 아니, 정확히는 채널을 돌린다. 채널을 돌리는 걸 TV 보는 것과 착각하는 시대가 케이블 TV의 시대이다. 채널을 돌린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손에 쥐어진 리모콘이라는 총을 쏨으로써 한 채널의 한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지속성, 문법적인 맥락을 죽이는 행위이다. 채널을 돌리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탈 맥락적인 행위이다. 나는 무슨 신경증 걸린 사람처럼, 그 총을 마구 쏘아댄다. 드라마가 나왔다가 뉴스가 나왔다가 39쇼핑의 광고가 나왔다가 2차대전의 어느 전선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가 불교 방송이 나오기도 하고 그 다음엔 만화가 나오기도 한다. 그 모든 걸 나는 거의 동시에 관람하고 있다. 너 미쳤니? 이렇게 리모콘을 쏘아대는 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총을 쏘아대는, 알고 보면 정신병에 걸린 살인범일지도 모른다...
광고와 뮤직비디오, 구분할 수 있니?
그러다가, 어쩌다가 MTV가 걸린다. 어느 뮤직 비디오가 진행 중이다. 아,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이건 뮤직 비디오가 아니다. 'MTV 스테이션 아이디(Station ID)'라는 거다. 그 시퀀스의 맨 끝에 MTV 로고가 뜨기 전까지, 나는 그걸 뮤직 비디오로 착각했다.
`쳇, 엠티비 광고로군.`
그 다음에, 어느 시퀀스가 이어진다. 흑인이 나와서, 테크노 풍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건 다시 뮤직 비디오인가? 그러나 그 끝에는 어느 술 이름이 등장한다. 그 술이름이 등장하기 전까지, 나는 그 시퀀스를 또다시 뮤직 비디오와 혼동했다.
`쳇, 이건 술 광고로군.`
술 광고 다음에, 이번엔 광고와 비슷한 어느 뮤직 비디오가 나온다. 가령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어느 뮤직 비디오가 나온다고 치자. 그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목 캔디 비슷한 사탕을 파로디하여 '푸토스(Footos)'라는 가짜 상표를 지어냈고 그 광고의 화면과 거의 흡사한 장면들을 차용하여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다. 맨 끝에, 혹은 맨 처음에, 'Foo Fitghers'라는 자막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화면을 정말 사탕 광고로 착각했을 지도 모른다.
MTV는 하루 종일 이런 식이다. 만일 내가 하루 종일 MTV를 켜놓고 있다면, 사실 어떤 것이 프로그램이고 어떤 것이 광고인지, 또 어떤 것이 자사 공지 사항인지 모른 채 MTV를 시청하는 것이 된다. 그 각각의 프로그램들 사이의 상업적인, 혹은 미학적인 경계가 없다. 그것들은 모두 비슷한 맥락이거나 맥락이 없이 자기 자신을 지우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MTV 자신을 광고하는 화면과 MTV를 먹여 살리는 광고주의 광고 화면과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뮤직 비디오'의 화면이 연속된다. 그건 마치, 케이블 텔레비젼의 각 채널들을 오가며 맥락없이 시청하는 시청자의 머릿속을 재현하는 것 같아 보인다. MTV의 편성 자체가 '탈 맥락적'인 것이다.
미학적 혁명의 절정, 탈맥락적 편성
MTV 편성의 미학적 혁명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한 프로그램이 탈맥락적이라기 보다는, 편성 자체가 탈맥락적이다. 나는 논리가 결여된, 혹은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며 동시에 서로의 온전한 몸뚱아리를 숨김으로써 결국에는 전체가 다 어떤 '돈벌이'의 수단으로서 동일하게 참여하는 아주 큰 차원의 '광고'를 보고 있는 것이거나, 혹은 광고가 광고가 아니고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이 아닌, 그래서 결국에는 각각의 욕망들이 가지고 있는 이면을 보여주는 어느 포스트 모던한 정치 프로그램을 목격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MTV 편성의 미학은 그대로 뮤직 비디오의 미학과 연결된다. 뮤직 비디오는 확실히 기존의 영상물들과는 구별되는 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가령 우리의 뇌리 속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하'의 히트 넘버 <Take On Me>의 뮤직 비디오를 보자. 주인공들은 일차적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들이다. 그들의 연주 장면이 명백히 뮤직 비디오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뮤직 비디오에 등장하는 어느 패스트푸드점 여종업원이 즐겨 보는 만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들은 내러티브의 주인공이다. 그 내러티브는 뮤직 비디오의 내러티브이기도 하고 여종업원이 보는 만화의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주인공들은 뮤직 비디오라는 영상물의 내러티브를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등장인물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내러티브의 안에 존재하는 2차적 내러티브의 격자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기도 하다. 여기서 '출발 비디오 여행'의 MC처럼 질문을 하자. 그들은 누구인가? 가수인가? 아니면 아하 그들 자체인가? 그것도 아니면 뮤직 비디오라는 하나의 짧은 '극영화'의 등장인물들인가? 뮤직 비디오에 관한 이러한 의문은 보통의 피쳐 필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제기할 수도 있는 동일한 의문에 비해 훨씬 심각하고 복잡하다. 대답을 하자. 그들은 그 모두이다. 최소한 그 등장 인물들은 세 겹이다. 그 '세 겹'의 그들이 동시에 맥락화되어 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 하자. 그 세 겹을 구분하는 맥락이 탈각되어 있다. 그들은 가수이기 때문에 마치 '라이브' 공연장을 시뮬레이션 하듯 노래를 하고, 동시에 그들은 음반을 팔아먹는 스타 자체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으로 광고되는 광고 대상이고, 또한 뮤직 비디오라는 특별한 영상 구성물의 내러티브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등장인물들이다. 그 세 겹의 상업적, 미학적 맥락들이 '아하'라는 밴드의 멤버들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동시에 그 세 겹의 맥락을 배타적으로 특징짓던 경계선들이 뮤직 비디오를 통해 무너진다. MTV의 스테이션 아이디, 광고, 뮤직 비디오의 경계가 탈맥락화되어 있는 것과 이러한 뮤직 비디오의 정황은 일직선으로 소통한다. 그래서 오히려, 뮤직 비디오는 MTV의 편성 내에서 연속성을 가진다.
등장인물에 관한 이러한 미학적 문제제기는 그대로 공간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질 수 있다. 공간에 관한 논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제로 이들이 노는 공간이 공연장인가, 아니면 세트인가에 관한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영국 밴드 스웨이드의 어느 뮤직 비디오를 보자. 그들은 한 순간은 지하철이었다가, 다음 순간은 공연장이 되는 어느 공간에 위치한다. 공간은 탈맥락화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도상학적 차용에 관한 문제이다. REM의 뮤직 비디오들이 그런 걸 잘 보여 준다. 예를 들어 <Lotus>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그 공간은 명백히 영국의 화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도상학적 공간이다. 살들은 정육점에 걸린 고기들처럼 흩어져 있고, 대신 그 살들은 서커스장처럼 구분되고 배치된 기하학적 라인에 의해 재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유의 운동성을 보여주는 베이컨의 공간을 REM의 뮤직 비디오는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럴 때 그 공간은 고전에서 차용된, 그리하여 탈맥락화된 새로운 공간이다. 그 공간 속에 마이클 스타이프가 마치 베이컨 그림의 등장인물처럼 이상한 자세로 존재하고 있다.이상과 같은 간단한 예를 통해 보더라도 뮤직 비디오가 제기하는 영상적 의미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것이 처음에는 어느 가수의 어느 음반이 팔리는 양을 늘리기 위해 제작된 일종의 광고였겠지만 나중에는 점차 그 모든 것을 혼합하고 뒤섞으면서 새롭게 존재하게 되는 탈근대적 텍스트의 대표적 사례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재미있는 것은, 뮤직 비디오의 이러한 특성이 MTV의 독특한 편성 속에서 탈맥락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성기완/대중음악 평론가 creo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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