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감정적 빙하
추천작 Part II - 심야가 좋다 : 미카엘 하네케의 밤
1998년 런던에서 열린 미카엘 하네케 회고전에서 한 비평가는 그를 ‘논쟁적인 실존주의자’로 다소 느슨하게 규정하면서도 그의 작품이 일관되게 지닌 불편함에 대해 관객에게 경고해두는 걸 잊지 않았다. 미카엘 하네케와 그의 전작들에 대해 이렇다 할 노출이 없던 국내에 하필 가장 ‘악명’ 높은 <퍼니게임>(1997)이 만들어지자마자 곧바로 찾아왔으니 경기를 일으킬 만하다. 말끔하게 생긴 청년이 실실 웃으며 일가족을 끔찍하게 고문하고 몰살시켜버리는 가공스런 뻔뻔함이라니. 그런데 상종 못할 듯했던 그 인간이 이번에는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고 국내에서도 일찌감치 비평적 찬사를 쏟아내기 시작한 <피아니스트>(2002)를 보내왔다. 이자벨 위페르의 놀랍도록 치밀한 연기가 아니더라도 만만치 않은 내공을 뿜어내는 이 영화를 보면 하네케란 작자의 정체가 도대체 뭘까 궁금해진다.
‘폭력에 관한 3부작’으로 불리는 <일곱번째 대륙>(1988), <베니의 비디오>(1992),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1994)이 그 의구심을 풀어줄 만하다. 장편 데뷔작 <일곱번째 대륙>부터 <퍼니게임>까지 10년 동안 차례로 만들어진 영화들에선 기묘하게 변주되는 공통분모가 있다. 소년이거나 소녀, 혹은 10대 후반의 청소년이 꼭 등장하는데 이들의 표정이나 내면은 징그러울 만치 차갑고 냉담하다. 심지어 누군가를 태연히 살해한다. 그리고 단란했던 중산층 가정이 몽땅 죽어버리거나 파괴되는 결말을 맞는다. 하네케는 자신이야말로 낙천주의자이며, 오락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비관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유인즉 낙천주의자는 사람들의 냉담 혹은 무감각을 흔들어 깨우려 노력하기 때문이라나. 습관적이고 수동적으로 현실을 지각하는 사람들의 무심한 행태에 균열을 내기 위해 관객이 예기치 못했던 강도의 폭력적 상황으로 극도의 혼란감을 주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가장 친밀하게 느낄 법한 대상을 꼭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등장시키는 건 그래서 우연 같지 않다. 여기에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비엔나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하네케다운 문구가 동원되기도 한다. “감정적 빙하작용”, “자신을 자기로부터 소외시키기”, “사실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사실주의”….
<퍼니게임>과 달리 3부작은 공히 일상의 지속과 반복을 아주 느린 속도로, 정밀하게 관찰하다가 영화 마지막 몇분 동안 불현듯 충격적인 반전을 일으킨다. 그러면 착 가라앉았던 감정 혹은 정서는 급속 냉각되다 못해 급체하는 듯한 효과를 맞이한다. <베니의 비디오>에서 소년은 비슷한 또래의 소녀를 자기 방으로 초대한 뒤 그를 돼지 도살하는 기구로 살해한다. 소년은 이 과정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부모에게 보여준다. 어쩔 줄 몰라하던 부모는 “우리는 널 사랑한단다”라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공범자가 된다. 물론 아버지는 “너 왜 그랬니” 정도는 묻는다. “뭘?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게 어땠는지 보고 싶었나봐요.” 소년은 돼지를 도살하는 장면을 찍고는 그걸 되풀이해서 보곤 했다. 결정적인 건 그 다음이다. 주검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두고 소곤소곤 방법을 상의하던 부모의 대화는 소년의 비디오카메라에 찍혀 있었고, 소년은 이 대목만 경찰에 넘겨 감쪽같이 부모를 ‘처치’해버린다(부디 스포일러라 비난하지 말길). 소년이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굳이 그 이유를 알 필요도 없다. 이 소년을 보고 있노라면 <퍼니게임>은 이 소년의 청소년기를 그린 속편 같다. 혹 <베니의 비디오>가 너무 드라마틱하다고 느낀다면, 실화를 토대로 만든 듯한 다른 두 작품에서 하네케적 사실주의 미학의 진수를 맛보시길. 이성욱 lewook@hani.co.kr
●
<일곱번째 대륙>(The Seventh Continent)
게오르그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그의 아내 안나는 가족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안경사 일을 한다. 어린 딸 에바는 몹시 귀엽고 똘똘하게 생겼다. 그런데 이들 가족은 문득 삶의 무감각과 단절감에 빠져든다. 그리고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대륙으로 떠날 준비에 들어간다. 게오르그의 부모조차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으로 이들은 그 결심을 실천한다.
●
<베니의 비디오>(Benny’s Video)
비디오의 세계에 탐닉하는 베니는 자기 방을 미니 스튜디오처럼 꾸며놓았다. 그는 뭔가를 끊임없이 촬영하고 편집한다. 베니는 비디오 가게에서 하염없이 화면을 응시하는 소녀를 보고 어떤 유대감을 느꼈는지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46살이란 늦은 나이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하네케는 그 이전에 방송작가로 일했다. 소년이 미디어와 맺는 관계를 보면 감독의 이력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 (71 Fragments of a Chronology of Chance)
1993년 크리스마스 전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열아홉살 대학생이 은행에 들어가 총을 난사한다. 영화는 이 대학생과 조우하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오랜 시간 관찰한다. 이들이 비극을 맞이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흥미롭게도 등장인물들의 일상 사이사이에 유고 내전, 소말리아 내전 등 비극의 현장을 전하는 뉴스릴이 자꾸 끼어든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