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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들 [1]
김혜리 2003-04-18

쉰살 악동 페드로 아저씨, 그의 고독에 말걸기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속 인물 열전, 그리고 그가 말하는 `나와 영화` 이야기

그녀에게

어젯밤, 작은 여자아이의 엄마가 됐다는 너의 전화를 받았어. 우리가 작은 여자아이였던 옛날부터 지금까지 친구들을 살피고 챙기는 엄마 같은 아이였던 네가 이제 진짜 엄마가 된 거구나. 엄마가 되는 일에도 소질이 필요하다면, 넌 분명히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엄마가 될 거야. 내가 아는 너, 모든 사람들 속의 약자를 알아보고, 말없는 포옹의 힘을 이해하고 축제를 즐기고 모험을 겁내지 않는 내 친구가 아니라면 다른 누가 멋진 엄마가 될 수 있겠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너에게 한 영화감독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

그 사람은 돈키호테의 고향 스페인 라만차에서 태어났어. 이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어렸을 적 그는 저녁 식사 뒤 둘러앉은 식구들에게 전날 밤 본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대. 이상하지? 극장에서 같이 본 영화들이었는데도 누이들은 알모도바르가 상상을 덧붙여 고치고 부풀린 영화 이야기를 진짜 영화보다 더 좋아했단다. 페드로는 먼 여행을 떠날 만큼 팔다리가 건장해질 때까지 마을 강물에서 헤엄치고 매 웨스트와 베티 데이비스의 대사를 외고, 소설책을 잔뜩 읽으며 시간을 보냈어. 세상이 작아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욕심많은 젊은이들이 흔히 그러듯 넓고 시끄러운 도시로 갔어. 마드리드에서 10년 동안 전화회사 직원으로 빵을 벌면서 만화를 그리고 사진이 곁들여진 소설을 쓰고 노래를 불렀대. 그리고 8mm 카메라로 작은 영화를 찍다가 자신이 돌진하고 싶은 풍차를 마침내 발견했지.

그는 한번 보면 잊기 곤란한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어. 우리나라에는 1986년에 만든 <마타도르> 다음부터 꽤 많이 소개됐지만 그의 영화를 설명하기는 만만치 않아. 너나할 것 없이 사랑을 간절히 구하는 그의 주인공들은 “내가 뭘 어쨌기에!”라고 넋두리할 만한 지독한 수난에 휘말리게 돼. 꼬리표를 붙이자면 스릴있는 멜로드라마 아니면 무척 관능적인 스릴러가 맞겠지. 알모도바르 영화에선 인간부터 벽지까지 ‘적당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과잉이 표준이라고나 할까. 원색이 주책없이 범람하고 농담은 자중할 줄 모르지. 사랑의 절정을 맛보기 위해 애무하는 대신 서로를 죽이고, 프로포즈를 위해 데이트 신청을 하는 대신 납치한 인간들이 잔뜩 나오지. 어쨌거나 “나는 어둡고 환희에 찬 지하 주변부에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알모도바르가 작정하고 관능을 묘사할 때면 소심한 사람들을 신경쇠약에 빠뜨리기에 충분했어.

사람들은 악동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80년대는 <키카>가 나온 1993년에 끝났다고들 말해. 그게 아마 감독 자신이 마흔 모퉁이를 돈 직후일 거야. 1997년의 <라이브 플래쉬>, 1999년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얼핏 봐도 알 수 있지. 스토리는 훨씬 투명해져 따라잡기 수월해졌고, 진액이 뚝뚝 듣던 컬러는 엷어졌고 익살은 부드러워졌어. 주저하던 지지자들은 그의 영화를 말하며 서슴없이 ‘위대함’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지. 그렇지만 알모도바르의 마음이 바뀐 건 아니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열정이 지닌 독점욕이 무엇인지, 세상 사람들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세세히 표현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알모도바르는 여전히 열성적으로 떠들고 있어. 알모도바르 자신도 “예전 영화들이 없었다면 만들 수 없는 영화”라고 말하니까.

사실 지금보다 젊었던 나는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흔쾌히 좋아할 수 없었어. 절박한 인간의 천태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는 태연자약하게 삶을 낙관하는 품이 못 미더웠나봐. 하지만 지금 나는 알모도바르 영화를 보면서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감동해. 하긴 우리도 이제 성숙이란 지나간 날을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가진 그대로 타인을 포옹하는- 혹은 잉태하는- 품이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나봐. 임신한 너의 미소가 두려움 없이 빛났던 것도 아이로 인해 너의 삶이 더욱 위험하고 열정적이고 드라마틱한 것이 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일 거야. <그녀에게>라는 알모도바르의 새 영화가 곧 개봉해. 원래 제목은 “그녀에게 말해요”라는 뜻이래. 고독 속에서 홀로 춤추는 여자들, 사랑 아니면 살 이유가 뭐냐고 묻는 남자들, 딸 같은 아들과 아들 같은 딸이 나오는 눈물나는 영화야. 지금은 너도 꼬마도 침대에서 꼼짝 못하겠지? 하지만 언젠가 너와 나, 그리고 너의 딸이 어울려 웃고 울고 수다를 떨며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보는 광경을 나는 벌써부터 그려볼 수 있어. 사랑해, 친구야.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편집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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