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0월21일 개봉, 조지 후앙 감독
“사랑으로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내레이션으로 문을 여는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의 원제는 ‘악어들과 헤엄치기’(Swimming with Sharks). 악어는 생존 경쟁의 단련된 투사들, 구체적으로는 냉혹한 할리우드 제작자들을 은유한다. 그러니 이 헤엄은 생사를 건 투쟁이 된다. 자리 하나를 위해 살인도 경쾌한 플롯의 리듬에 묻어버리는 잔혹한 투쟁.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는 그걸 비판하는 척하면서, 그 스스로 살인을 플롯의 즐거움으로 이용해버린다. 이건 자기모순인가, 아니면 자기폭로인가. 호의를
가진 관객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후자의 편을 들고 싶다. 걸작도 아니고, 개척자적 시도도 아니며, 기발한 아이디어로 중무장한 화제작도 아니지만,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는 애착이 쉽게 거둬지지 않는 소품이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이 영화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저 그런 한편의 영화로 파묻혔다. <씨네21> 역시 한 페이지짜리 소개에 그쳤다. 이 영화가 그보다 더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큰소리치긴 머쓱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잔인할 만큼 냉소적인
시선과 교묘한 교차편집의 연출력은 그것만으로도 포만감을 주며, 무엇보다 90년대 할리우드가 발견한 최고의 배우 케빈 스페이시의 연기가 이미 여기서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확인하는 즐거움도 선사한다. 여기에 초보 연기자 시절의 베니치오 델 토로의 이미 노숙한 풍모가 덤이다.
냉혈한이고 사디스트이며 명민한 케빈 스페이시는 키스톤영화사의 부사장이요, 실권자다. 그의 비서로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한 프랭크 웨일리가 들어온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중요한 순간마다 반복 등장한다. 그 질문은 자존심과 품위를 가뿐히 걷어차며, 마침내 최후의 금기마저 넘어버린다. 인간은, 상어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애정을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그 최초의 대답에 충실했던 프랭크는, 누구도 예상못한 끔찍한 선택을 한 뒤, 출세의 비결을 묻는 동료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 자, 이 기발한 반전이 즐거운가.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즐겁다면 이 영화의 ‘시장 경쟁’은 성공한 것이다. 즐겁지 않다면 이 영화의 윤리학이 성공한 것이다.
이 영화로 데뷔한 조지 후앙 감독은 생존 경쟁에서 별로 성공하진 못했다. 그뒤로, <트로이 전쟁>이란 무명의 영화 한편만을 만들고는 죽쑤고 있다. “선한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영화 속 대사가 맞다면, 그가 악인이 아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