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27일 개봉,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
(이 영화가 좋다고 우리는 이미 말했다. 그게 1페이지였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다시 거론하지 못했다. 그것도 걸린다. 다시 봐도 이 영화는 우리가 2페이지로 소개한 많은 영화들보다, 그리고 재론하면서 더 많은 페이지에 걸쳐 이리저리 뜯어본 몇몇 영화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영화에 대한 뒤늦은 찬사를 작성하는 일에 동원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영화 글쟁이가 쓴 해설을 읽고 싶은 기분은 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전하는 삶의 피로와 허기,그를 실어나르는 시적 운율은 그 자체로 너무 명료해서 어줍잖은 주석을 초라하게 만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게 즐거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을 쓴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이 쓰고 연출한 영화다. 그리고 글렌 클로즈, 카메론 디아즈, 홀리 헌터, 칼리스타 플록하트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모여 이루어낸 부러운 성공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올해 아카데미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미션 투 마스>처럼 보통의 이야기체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빛나는 영화라면 모를까,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의 기준으로 봐도 이 영화는 빼어나기 때문이다. 로비와 마케팅의 부족 때문일까. 궁금해서 뒤져보니, 놀랍게도 이 영화는 아직 미국에서 개봉조차 되지 않았다. 프랑스에선 20만 관객을 모았고, 한국에서도 개봉됐는데, 정작 본국에선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다. 배급사인 MGM/UA에 따르면 “이 영화는 위대한 소품이지만, 극장에서 충분한 관객을 모으긴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영화계도 이렇게 한심한 데가 있다.
<그녀를…>은 전통적 방식으로 훌륭한 영화다. 몇개의 에피소드를 병렬하는 척하면서, 서로 얽어놓는 기법이 눈에 띄지만, 그것은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 이후로 널리 애용돼온 것이다. 무엇보다 구성과 캐릭터와 편집이 이만큼 정갈하고 세련된 미국영화는 정말 드물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많은 미국 인디영화들이 사소한 것에 관한 잡담에 몰두하고 있는 데 반해, 선댄스 키드인 가르시아는(그는 촬영기사 출신이다) 젊은이라곤 믿기지 않을 깊은 시선으로, 묵묵히 삶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맑은 비애의 결정체를 길어올린다. 개인적으로는, 죽어가는 동성애자 릴리와 크리스틴의 에피소드가 가장 무겁게 다가왔다. 지난해 나온 외화중에서 주인공들의 눈빛을(심지어 맹인인 카메론 디아즈의 눈빛조차) 이렇게 오랜 잔상으로 남겨두는 영화는 <와호장룡>말고는 이 영화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