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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틀렸다 -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김혜리 2001-04-27

찰나여, 손 내밀면 사라지는 마법의 순간이여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청첩장’부터 잘못 읽은 영화였다. 우리말 제목이 붙기 전, 영화 원제와 광고 사진을 본 나는 무심코 카메론 디아즈가 줄리아 로버츠의 ‘베스트 프렌드’려니 짐작했다. 한술 더 떠, 단짝 친구의 예비 신랑과 벼락 같은 사랑에 빠진 줄리아 로버츠가 우왕좌왕하는 코미디겠지 넘겨짚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문제의 베스트 프렌드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남자친구였다. 저런, 헛짚었군. 그렇다면방랑 끝에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친구에게서 참사랑을 발견한다는 ‘파랑새’ 스토리?

음식평론가 줄리안(줄리아 로버츠)에게 옛 애인이자 9년지기 친구인 마이클(더모트 멀로니)이 결혼 소식을 알려온다. 우정이 사랑으로 승화되리라 믿는 줄리안은 결혼식 딴죽걸기에 나선다. 어딘가 귀익은 이야기다. 그런데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볼수록 이상하다.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발치에 펼쳐진 주단 깔린 평탄한 꽃길을 슬쩍슬쩍 피해간다.줄리아 로버츠가 분한 줄리안은 화통한 성격의 서글서글한 미인인데다가 자수성가형 커리어 우먼이다. 이 장르의 주고객인 젊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동정을 받고도 남는 캐릭터다. 그런데 멋쟁이 그녀가 남자를 되찾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는 비열하고 유치한 암수를 쓴다. 그런가 하면 줄리안의 연적 키미는 애교스런 재벌 상속녀에다 결혼을 위해 대학까지 그만두는 미움받을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도, 순수하고 현명해서 미워하기가 쉽지 않다. 언뜻 보면 여성이 여성의 적이 되는 해묵은 구도지만, 관객의 머릿속에서 두 여자는 이리저리 서성이며 좀처럼 선악으로 마주 서지 않는다.

‘결혼식 재뿌리기’는 <어느날 밤 생긴 일>이나 <필라델피아 스토리>같은 스크루볼 코미디가 즐겨온 모티브. <내 남자친구…>는 남자 아닌 여자가 결혼식을 훼방놓는다는 점에서 클래식 로맨틱 코미디와 일단 다르다. 그러나 더 큰 차이는 주인공의 시도가 실패하고 한 남녀 커플의 파괴가 또다른 한쌍의 탄생으로 대체되지 않는 점이다. 줄리안이 사랑 승부에 이기건 지건 쓴맛을 남기게 될 영화의 딜레마를 감독은 줄리안의 게이 친구 조지(루퍼트 에버렛)를 통해 완벽하게 해결한다. 그는 삶을 비옥하게 하는 사랑은 한 종류가 아니며, 규정하기 힘들거나 현실적 쓸모가 없다고 해서 그 사랑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터득한 현자다. “서로 결혼하지 않는다고, 섹스하지 않는다고 해서, 춤을 멈춰선 안 되지.” 피로연장에 망연히 남겨진 줄리안에게 조지가 속삭이는 ‘삶=춤’의 철학은 영화의 초점을 남녀의 짝짓기로부터 남녀의 우정으로, 삶을 향유하는 비법으로 옮겨 놓는다.

음악과 스타의 활용에서도 <내 남자친구…>는 일급이다. 같은 장르영화면서도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는 잘 만든 누아르나 SF보다 인색한 평가를 받곤 한다.<내 남자친구…>처럼 미국 내 흥행수입을 1억달러 이상 올린 여름영화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앤드루 새리스 같은 평론가는 <필름코멘트>에서 인생에서 선택의 타이밍이라는 문제를 묘파한 이 영화의 솜씨를 에릭 로메르 영화에 견주기도 했다. 실제로 <내 남자친구…>에는 잡을 수 없는 삶의 찰나들에 대한 우수어린 이해가 스며 있다. 결혼을 앞둔 마이클과 마지막으로 단둘이 보트를 타는 대목은 좋은 예다. 줄리안은 배가 다리 그늘을 지날 때 고백을 망설인다. 하지만 배는 너무도 빨리 그늘을 벗어나 환한 햇살 속으로 나온다. 그리고 마법의 순간은 영원히 사라진다.

행복에 질식할 듯한 새 신부의 모습으로 영화를 열고 닫으면서도, <내 남자친구…>는 결혼의 신화를 희석시킨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논쟁을 거꾸로 쓴 듯한 사랑론과 우정론으로 로맨틱 코미디 걸작의 계보를 이은 셈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결혼제도를 부정하는 피켓을 내두르는 것도 아니다. <내 남자친구…>는 어쨌거나 마이클과 키미의 결혼 성공담이며 그들의 사랑에 사심없는 축복도 보낸다. P.J. 호간 감독은 관객이 이런 종류의 영화에 기대하는 화사한 파티는 파티대로 벌이면서, 웨딩케이크 속에 냉정하고 원숙한 통찰을 적은 쪽지를 숨겨 놓는다. <내 남자친구…>는 사랑 안에서 흥겹게 춤을 출 뿐, 사랑을 통해 어디에도 이르고자 하지 않는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생산해온 무수한 동화들과 똑같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요”라는 말로 끝을 맺지만, 그 행복은 대범하게도 ‘짝짓기’에 결박되어 있지 않다. <씨네21>은 <내 남자친구…>에 호의적인 평을 붙였지만 그 세심하게 준비된 '파티'에 충분히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로맨틱 코미디 이상의 로맨틱 코미디, <내 남자친구…>는 아름다운 결혼을 꿈꾸는 관객도, 또다른 색의 사랑을 꿈꾸는 관객도 흔쾌히 품에 받아안을 수 있는 예쁜 부케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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