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흥미로운 영화제는 ‘발견’의 재미를 주는 영화제다.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수백편의 영화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경우엔 더 그렇다. 올해 부산에서 당신의 눈에 들어온 보석 같은 영화는 무엇이었나 이구동성으로 꼽는 한편이 있다면 단연 <질투는 나의 힘>일 것이다. 유난히 처음 선보이는 한국영화가 드물었던 올해, <질투는 나의 힘>은 최고의 화제작 가운데 한편이었다. 내년 4월에 개봉할 이 영화를 비롯해 신선한 홍콩영화 <너는 찍고, 나는 쏘고>와 주목할 만한 다큐멘터리 <연안에서 온 딸> 등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한 3편의 감독을 만나봤다.편집자
부산의 발견 1 -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감독냉소를 지운 홍상수? 다르다!
올해 부산영화제를 통해 처음 소개된 박찬옥의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홍상수적이기는 한데 뭔가 다르다’는 평가를 내리곤 했다. ‘홍상수적’이라는 표현이 홍상수 그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감독의 영화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이 결코 흔쾌한 승인의 표시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질투는 나의 힘>의 어떤 부분이 많은 이들에게 ‘뭔가 다른’ 것으로 느껴졌던 것일까. 아마 앞으로 이 영화를 두고 숱한 견해들이 오가게 될 테지만, 개인적으로도 ‘자학적인 중산층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펼쳐 보이는 일상의 판타지’로서의 홍상수 영화들과 <질투는 나의 힘> 사이엔 분명 거리가 있다고 본다. 또한 빈정거리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서서히 남성적 판타지와 시선의 구조를 설득력 있게 드러낼 줄 안다는 것은 여성 감독으로서의 박찬옥이 지닌 진정한 ‘힘’이다.
질투란 어떤 감정인가. 혹은 질투의 감정은 어떤 관계망 안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질투의 대상이 거부되고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질투하는 자 스스로를 사로잡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과연 그 이후 질투하던 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질투란 스스로가 충일한 존재라고 느끼던 이에게 불현듯 결핍을 맛보게 한다. <질투는 나의 힘>의 주인공인 대학원생 원상은 뜻하지 않게 위와 같은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애인이 사귀어오던 유부남 윤식이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사에 일자리를 얻어 윤식의 삶을 관찰한다. 그의 인간관계, 문학적 취향, 그리고 여성과의 ‘로맨스’에 관한 철학(이라기보다는 인생관)을 바라보면서, 원상은 윤식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문제는 질투란 사실 이미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상실한 데서 초래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지니고 있지 않았으나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나 아닌 다른 이가 지니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원상을 ‘배신’한 애인, 원상이 정말 상실한 그 무엇의 존재는 비가시적이다. 그녀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혹은 흘낏 스쳐가는 옆모습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원상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결별한 애인이 아닌 윤식에게 좀더 밀착함으로써 그가 지니고 있는 것과 자신이 지니지 못한 것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질투는 나의 힘>은 흥미로워진다. 심술궂게도 감독은 원상과 윤식 사이에 수의자이자 아마추어 사진작가인 성연을 개입시킴으로써, 원상의 은밀한 탐색을 더욱 불편한 것으로 만든다. 그저 바라볼 뿐인 서툰 탐정 원상의 무력한 응시와 원상에 대한 윤식과 성연의 오인 사이를 오가며 감독은 건조하다기보다는 호기심이 깃든 프레임으로 이 모든 게임을 지켜본다. 원상은 자신의 결핍을 자극하지 않는 하숙집 딸과의 연애를 거부한다. 원상은 점점 다분히 (겉으론 전혀 내색하지 않지만) 자학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윤식의 연애담은 그런 그에게 일종의 환상이 펼쳐지는 스크린이 된다.
<질투는 나의 힘>에는 또한 세대간에 펼쳐지는 오해와 복수심이라는 주제가 있다. 가령, 문성근이 연기한 윤식이 노래방에서 원상에게 ‘<꽃잎>이나 한번 불러보지’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한 배우의 자기인용과 패러디를 넘어선 묘한 울림을 느끼게 된다. 굳이 제목에까지 끌어들인 기형도,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월북작가 박태원과 이태준 등을 매개로 퍼즐 맞추듯 영화를 다시 짜맞추어보는 것도 <질투는 나의 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질투는 나의 힘>은 분명 예상치 못했던 독특한 시선과 스타일을 갖춘 영화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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