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순종 아니 혼종!
나운규는 <아리랑>이 “외국영화를 흉내낸” 것이라고 말했다. 1936년에 쓰여진 글이라서 자기 작품에 대해 성찰적인 거리를 유지하게 된 시점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글로부터 강하게 감지되는 맥락은 당시에 쏟아져들어온 새로운 종류의 서양영화들이 관객의 취향을 바꾸었고 이에 따라 나운규 또한 관객의 새로운 취향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구상하고 만들어나갔다는 점이다. <아리랑>이 매력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족의 현실을 고발하는, 비장하고 장엄한 리얼리즘 양식뿐만 아니라 “빠른 액션, 우스운 코미디, 쓰라린 감정을 고루 건드리는” 작품이라는 점, 즉 ‘대작 양화(洋畵)’에 상응하는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아리랑>에 대한 모든 평문들이 절대로 빠뜨리지 않는 이른바 ‘심리적 몽타주’에 관해서도 해석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아리랑>이 예술영화로 받아들여진 가장 큰 요소’라는 평가가 많은데 이는 스타일상으로 <아리랑>이 전형적인 리얼리즘에 속하지 않을 가능성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나운규는 “억압된 표현의 자유에서 상징된 세계로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고 실제로 다른 영화들에서도 몽타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영화계에는 독일 표현주의영화의 대표작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베르트 비네, 1920)이 이미 소개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30년대에 등장한 이론가들은 소비에트의 몽타주 이론에 대해 상당히 정통해 있다. 나운규의 전기적인 사실을 보면 이들 영화를 직접 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말하자면 그는 당시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계 영화계의 조류와 어떤 식으로든 호흡을 함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리랑>의 모티브가 나운규의 고향 회령에서 불리던 민요 아리랑이며 그가 직접 개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운규는 일본인 제작자를 만났을 때 “조선의 민요극인데 절대로 손해는 안 볼 테니 제작을 해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가사 가운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표현이 갖고 있는 뉘앙스는 일본인 검열관의 눈에 발견되지 않은 채로 조선인들 사이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리랑 고개를 넘어 서울로 아리랑 구경을 가자’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뿐만 아니라 <아리랑>에는 연기와 대사면에서 신파의 기운도 다분했다. 신파는 한국 영화계에 뿌리내린 최초의 장르로서 대중에게 폭넓게 사랑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천하의 나운규라도 어떤 형태로든 신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요컨대 <아리랑>은 민족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고결한 틀 속에 가두어두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분방한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나운규 스스로가 자신이 출발했던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출발지점 자체도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아리랑>의 줄거리를 돌이켜보면 나운규의 페르소나인 영진은 인텔리에서 미치광이, 살인자, 그리고 세상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이라는 정체성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후에도 나운규가 연출하거나 주연한 영화에서 방랑자, 부랑아, 광인, 살인자 캐릭터는 거듭 반복해서 나타난다. 검열 당국과의 극단적인 대립을 감안해보면 현실에서 뿌리 뽑힌 부랑아는 뿌리내리기를 거부하는 독립운동가의 면모와 일견 통하는 데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대 최고의 영화 지성 가운데 한명인 나운규의 페르소나가 광기에 사로잡힌 살인자로 출발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되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