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난 반세기에 걸친 아네스 바르다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화두다. ‘누벨바그의 대모’로 불리는 아네스 바르다는 단편과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들고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면서, 여성의 비전과 욕망의 주제를 즐겨 다뤘다. 페미니즘 운동과 좌파 정치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작품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직면하는 조건들과 암묵적으로 강요받는 성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 그리고 여성이 자신의 육체와 맺는 다양한 관계들을 묘사해왔다.
여성성에 대한 관습적 정의나 여성 성역할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정면으로 대치하고 도전하면서, 영화라는 매체를 가장 독창적으로 그리고 가장
여성적으로 전유한 대표적인 여성감독. ‘프랑스 특별전-아네스 바르다’는 특정 지역이나 사조의 여성영화를 조명하던 기존의 ‘포커스’ 섹션의
연장. 이번 특별전에서는 아네스 바르다의 54년산 데뷔작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부터 지난해 완성한 최신 다큐멘터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까지 모두 7편의 작품과 만날 수 있다.
프로그래머 추천작 1-
<행복>
Le Bonheur 1964년 82분 극영화
아내 및 두 아이와 더불어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던 남자는 한 여자와 ‘불륜관계’에 빠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의 정부는 이제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안 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운다.
한 가정의 행복한 ‘봄소풍’ 풍경으로 시작한 영화는 아내 역할의 여성만 바뀐 채로 ‘가을소풍’ 풍경으로 막을 내린다.
<행복>의 이러한 스토리는 그 심오한 비판성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다층적이고 아이로니컬한 꼬임을 이해받지 못한 채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언뜻 한편의 관습적인 멜로드라마로 비쳐지는 이 영화가 여성의 전통적인 성역할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제약에
대해서 가하는 비판은 근본적이면서도 폭넓은 것이다.
그 인공성과 두드러짐을 통해서 마치 하나의 물질이나 극적인 요소처럼 사용되는 화려한 색채, ‘행복’의 의미를 전달하는 다양한 종류의 이미지와
클리셰들, 가정주부의 일상에 대한 꼼꼼하면서도 중립적인 묘사 등이 서로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결국 가족이라는 구조와 성역할이 어떻게
개인들에게 가부장적 지배를 관철시키게 되는지, 행복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이데올로기적 결과물에 불과한 것인지를 깨달아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머 추천작 2-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L’une chante l’autre pas 1976년 120분 극영화
1962년에서 77년에 이르는 약 15년 동안 수잔과 폴린이라는 두 여성의 삶과 여성운동의 발전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이영화는 바르다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영화적 수단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페미니즘적인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이별, 임신과 낙태, 출산과 양육, 일과 투쟁 등, 두 여성이 통과해야만 했던 ‘개별적인’ 여성적 경험들은 일종의 여성성장영화의
틀을 띠면서, 1960년대 이후 전개되는 여성들의 의식적 각성 및 집단적 투쟁의 과정과 평행적으로 묘사된다. 더구나 바르다는 영화 속에서
허구적인 것과 다큐적인 것,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을 서로 교차시킴으로써,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사회학적 기록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여성의
연대와 정치적 참여라는 이슈를 설득력 있게 구체화해나간다.
또한 영화는 두 여주인공이 주고받는 엽서들의 내용과 수잔이 공연에서 부르는 노래들을 공들여 묘사하는데, 내레이션으로 제시되는 엽서의 내용들은
여성의 내면적인 욕망들간의 충돌을 ‘글쓰기’한다면, 뮤지컬 코미디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공연장면들은 여성의 육체적 자율성과 같은 이슈들을
‘노래’함으로써 여성적 언어라는 문제를 인상적인 방식으로 제기해 준다.
프로그래머 추천작 3-
<방랑자>
Sans toit ni loi 1985년 105분 극영화
<방랑자>는 영화사상 가장 이례적이고 낯선 여성성의 소유자를 선보인다. 예의없고 이기적인 데다가 씻지 않아서 더럽고 꾸미지 않아서 매력없어보이는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며 어떤 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 방랑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나’라는 이름의 그녀가 차디찬 시체로 발견되기까지의 여정을 전지적 시점의 화면이나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재구성하여
보여준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여러 공간들을 떠도는 ‘모나’의 발길을 쫓아가면서 한 아웃사이더 여성이 지리적이고 사회적인 환경과 맺는 관계를
기록한다면, 상점주인, 양치기, 농부, 노동자, 외국이민자, 하녀와 같은 사람들의 ‘모나’에 대한 서로 다른 증언들은 전통적 여성성을 벗어나
있는 한 여성을 가부장제 사회가 어떻게 기억하고 또 재현하는가에 대한 성찰적인 스펙트럼을 펼쳐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매력은 그 실존 자체만으로도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감과 설명하기 어려운 불온한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모나’의
이미지 자체 그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와 함께 자유롭게 걷고 그녀의 비전과 감각을 몸으로 공유하게 만드는 영화적 힘으로부터 나온다.
주유신/ 프랑스 특별전 프로그래머
Cleo de 5 a 7 1961년 90분 극영화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믿는 끌레오는 의사의 최종 진단을 기다리며 파리 거리를 헤맨다. 쇼핑을 하고, 택시를 타고, 애인을 만나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낯선 남자를 만나면서, 자기 연민의 무장이 풀어지고, 끌레오는 ‘이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미소짓는다. 극의 시간과 물리적
시간을 일치시켜 인물의 감정을 세밀하게 따라잡고 있으며, 평단으로부터 “파리에서 만들어진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La Pointe Courte 1954년 89분 극영화
아네스 바르다의 데뷔작. 이별 직전의 두 남녀가 라 푸앵트 쿠르트 근처의 어촌을 방문한다. 남자의 고향이기도 한 그 마을에선 위생당국과의
갈등, 아이의 죽음, 결혼식 등 시끄러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지만, 추억과 현재, 서로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남녀의 내면을
파고들진 못한다. 앙드레 바쟁이 격찬한 작품으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진정한 첫 번째 영화’로 꼽히기도 한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2000년 82분 다큐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이 작품의 모티브. 감독은 ‘줍고’, ‘수집하는’ 사람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민다. 수확이 끝난 땅에 버려진
야채와 과일을 줍는 사람, 개펄에서 조개를 줍는 사람,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줍는 사람, 재활용품으로 예술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버려지는 것의
가치, 소비되는 것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실수로 촬영된 화면을 그대로 삽입하거나 감독 자신을 수집가로 묘사하는 등 자유롭게 그리고
주관적으로 서술한 에세이 스타일의 다큐멘터리.
<오페라 무페 거리>
L’Opera Mouffe 1958년 17분 다큐
파리의 라 무페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시적 다큐멘터리. 당시 첫째 딸을 임신중이던 아네스 바르다가 매일 거리에 나가 채집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연인들’, ‘술취함’, ‘휴일’, ‘노인’, ‘열망’ 등 주제별로 나열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의 생로병사와 부조리한 일상을 돌아보면, 마냥 즐겁고 희망적인 일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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