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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너머] 애정어린 비판은 없다

“뭘 어쩌라는 게 아냐. 그냥 화를 내고 있는 거지.” 운전대를 잡은 지인이 옆자리에 앉은 내게 말을 건넸다. 짜증스러운 경적 소리가 가득한 주말 서울 도심이었다.

경적에는 의미와 목적이 있다. 우선 길을 비켜달라는 요청이다. 자기 차가 얼른 가도록 하려는 이기적 목적이다. 그리고는 조심하라는 경고다. 다른 차가 사고가 나지 않도록 위험을 알리려는 이타적 목적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경적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울린다. 그저 허공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고 만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비판이 그렇듯이 말이다.

어느날 페이스북 쪽지로 작은 논쟁을 벌였다. 나는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토론에 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부아가 치민 채 논쟁이 끝났다. 얼마 뒤, 그가 보냈던 쪽지를 자세히 살펴봤다. 그런데 괜찮은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다. 평상시였다면 매우 고마워했을 법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부아가 치밀었던 순간, 나는 그 링크가 포함된 쪽지 전체를 지워버리고 싶어했다.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비판은 분명, 애정 어린 비판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부아가 치밀어 좋은 자료를 지워버리고 싶어졌을까. 단순하다. 그가 말을 꺼낸 방법 때문이었다. 좋은 의도나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판은 내게 교통체증이 심한 거리에서의 자동차 경적소리처럼 들리고 말았다.

그는 내가 몇달 동안 준비해서 내놓은 기획을 비판했다. 오랜 개인적 경험과 관련이 있기도 한, ‘소셜픽션 컨퍼런스@어린이대공원’이었다. 비판의 시작은 이 기획과 관련된 실패 사례를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격한 권력기관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했다.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는 그 권력기관이 나와 비슷한 기획을 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생각이 없는 집단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기획한 일이 그런 행태로 이어질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나서야, 원래 내게 알려주고 싶었던 자료를 링크했다. 아마도 이 기획과 관련해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 기획과 관련해 써놓은 글을 거의 읽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이 섰다. 화가 났다. 자료 링크는 클릭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리 주변에는 ‘애정 어린 비판’이 넘친다. 그것 때문에 애정도 깨지고 비판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라는 짧은 서두 뒤에 바로 서슴없이 말의 칼을 빼내어 꽂는다. 같은 편이랍시고, 애정을 핑계로 예의를 버린다. 베스트셀러가 됐던 <설득의 심리학>에서 로버트 치알디니 박사는 사람이 영향을 받는 이유를 여섯가지 드는데, 그중 두가지는 이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먼저 무언가 해준 사람의 영향을 받기 쉽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영향을 받기 쉽다." 비판을 한다면서 애정은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날선 칼만 표현해서는,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기 어렵다.

비판에 정말 필요한 것은 애정이 아니라 예의다. 같은 편이라도 날선 칼부터 앞세우는 비판은 귀부터 막고싶다. 적진에서 날아온 비판이라도 예의와 칭찬을 앞세우는 비판에는 귀를 열고 경청하고 싶어진다.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면, 그래서 비판을 한다면, 우선 귀담아 듣고 장점과 단점을 찾고 변화시키고 싶은 지점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줘야 한다. 극악무도한 적처럼 보이는 상대라도 그렇게 해야 목적이 달성된다. 뜻을 같이 하는 친구라면, 정말 ‘애정’의 대상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