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캠퍼스 씨네21 > 캠퍼스 씨네21 > 컬쳐
[콕!] 꼭 ‘그려야만’ 작품이니?

전시 <김구림-잘 알지도 못하면서>

매스미디어의 유물(1970)

1970년 5월15일 김구림은 동료 작가 정찬승, 방태수와 함께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문 앞에서 정체불명의 봉투를 지나는 학생들에게 배포한다. 제목은 <콘돔과 카바마인>, 한국 미술계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실험정신을 담은 작업이었다. 봉투 속 쪽지에는 “가루를 20cc의 냉수에 타고 자기 이름을 세번 반복한 뒤에 그것을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어 2번 봉투를 8시50분에 개봉하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고루한 미술 교육을 견딜 수 없어 대학을 1년 만에 그만둔 작가 김구림은 1958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한국 실험미술과 개념미술의 포문을 여는 대담한 작업을 지속했다. 1969년엔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를 제작했고, 이듬해엔 한강 다리 부근 강둑을 삼각형 모양으로 불태우는 작업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거행했다. 불을 낸 것을 알고 파출소에서 출동했다.

1969년 미술관에 얼음을 가져와 녹여 물바다로 만들려고 했던 그의 또 다른 작업 계획은 주최쪽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다. 불발에 그친 아이디어는 이번 회고전에서 실현되었다. 전시 오픈일에는 거대한 얼음이 전시장 가운데 놓여 녹고 있었고, 원본 필름이 유실되었던 <1/24초의 의미>가 16mm 필름으로 복원되어 상영됐다. 해프닝, 설치미술, 보디페인팅, 실험미술에 이르기까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해왔던 작업을 ‘이탈’하며 여러 실험을 지속해온 김구림의 전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게임이다.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지 않는 정신은 늙지 않는 것일까. 78살의 작가 김구림은 지금도 짱짱하다. “되는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발라보세요. 그림을 꼭 ‘그려야만’ 작품이 됩니까?” 1980년대 중반 김구림이 백남준에게 던진 말이라고 한다. <김구림-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10월1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sema.seoul.go.kr)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