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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난 나의 영화] 가을 날씨에 마음을 빼앗겼네

두기봉 감독의 어떤 영화

영화제라면 늘 영화보다 영화 보러 가는 길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4년 전 부산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영화제 개막 다음날, 대학동기 한명과 함께 금요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오후부터 진행되는 두기봉 마스터클래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부산역에서 내려 자원봉사자에게 어디로 가면 될지 물었더니, 마스터클래스가 무슨 호텔 같은 건물 이름 줄 알기에 성격 급한 동기와 나는 애꿎은 자원봉사자를 다그치다 역사를 나섰다. 그리고 도착한 그랜드호텔에서 두기봉 마스터클래스를 들었는데 내용은 가물가물하다. 대신 마스터클래스가 끝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창밖으로 해가 천천히 저물어가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던 찰나는 기억이 난다. 밖으로 나가 걸었던 해변길도 기억이 난다. 저녁을 먹은 뒤 어둑어둑해진 밤하늘 위로 달이 떠올랐고, 그 달이 나중에는 더 아득하고 더 작아졌지만 (술기운 탓인지) 더 예뻤던 기억도 난다. 다음날 느긋하게 일어나 두기봉 감독의 영화와 다른 영화도 몇 편 보았던 것 같은데 마찬가지다. 영화가 재미없지는 않았는데 아니 분명히 이제까지 가본 어떤 영화제에서 보았던 어떤 영화보다 재밌었던 것 같은데, 영화는 늘 가을 날씨에 조금은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석이 있는것 같다. 영화에 대한 기억은 날씨에 대한 기억에 지기 십상이다. 내가 입었던 옷의 두께, 그 두께 사이로 스며드는 청명한 햇빛, 가슴과 등이 순간적으로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선선한 공기, 그 공기가 이끄는 발걸음. 그 길에 흠뻑 깃든 가을 날씨에, 결국 극장에서 볼 때는 혼이 쏙 빠지도록 재밌는 두기봉 영화도 다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