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삶의 모양과 색깔은 제각각이라는 걸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경유>는 이스라엘에서 살아가고 있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다양한 삶의 결을 조명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이 어떤 지점에서 서로 스쳐 지나가고,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들여다본다. 마치 여러 경유지를 거치는 교통수단을 타고 이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랄까. 신예답지 않은 유려한 연출과 편집 솜씨가 필리핀 여성 감독 한나 에스피아를 주목하게 한다.
-당신은 필리핀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일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가족이 필리핀에서 관광회사를 운영한다. 이스라엘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하는 회사다. 우연히 회사를 찾아온 필리핀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3개월 된 아기와 함께 이스라엘에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 2009년부터 이스라엘이 5살 이하의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국외 추방하는 법을 만들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고, 거기서부터 시작한 영화다.
-<경유>는 옴니버스식의 구성이다. 다양한 인물과 플롯이 존재하는데, 이야기를 풀어나갈 열쇠가 된 인물이나 사건이 있나. =‘자넷’이 중요했다. 그녀는 등장인물 중 이스라엘에 산 지 가장 오래된 이주노동자로 나온다. 사실, 그녀의 롤모델은 내 어머니다.(웃음) 어머니가 이주노동의 경험이 있으셨던 건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자넷과 딸 야엘의 관계는 어머니와 나의 관계에 기반을 뒀다.
-편집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어떤 사건과 인물은 다음 에피소드에서 더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처럼 인물과 사건이 서로 ‘경유’한다는 느낌을 주는 편집 방식은 어떻게 구상했나. =내가 편집기사 출신이다. 어떤 장면이 영화의 이후 전개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등장했을 때 새로운 의미를 얻는 방식의 편집 스타일을 좋아한다. 다양한 캐릭터, 다양한 관점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