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층을 오르던 그 시간에 때마침 국악이 흘러나왔다. 귀 기울여 듣던 임권택 감독은 “역시 우리 음악이 좋다”며 나직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임권택 감독이 한 말이라 의미 있게 들렸다. 영화제를 시작하기 직전에는 70여 편의 현존하는 전작을 상영했고 영화제 동안에는 9편의 대표작을 상영하는 임권택 회고전에 붙여진 제목이 바로 “한국영화의 개벽”이 아니던가. 한국영화가 비로소 한국영화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장본인, 임권택을 부산에서 만났다.
-올해 부산 영화제의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 중 하나가 감독님의 회고전인 것 같습니다. 감독님의 소회는 어떠하신지요.
=그게 몇 작품 안 되면 상관이 없는데 다 합치면 70여 편 아니오. 예전에는 한 두 작품 하고 그만둔 제작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고 또 내가 제작자들과 그렇게 이물 없이 지낸 사이도 아니고 해서 일일이 그 작품들의 허락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을 거요. 내가 1960년대 초에 데뷔했는데 그때 영화란 극장에서 한번 보고 나면 버리는 쓰레기요. 지금처럼 이렇게 귀하게 여긴 때가 아니에요. 나 자신도 그런 걸 당연시 했고. 그런데 그런 걸 50여년 후에 이렇게 모아서 전작전을 한다니, 어찌 보면 나조차도 극장에서 한번 보고 다시 볼 여지가 없던 작품들을 다시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건데…. 과히 보고 싶지 않은 영화도 많고 안 보여졌으면 하는 부끄러운 작품도 있지만 어쨌든 보인다니, 거기에 비록 내 어린 나이의 치기 같은 것이 찍혔다 할지라도, 삶 자체를 따라 변해간 것도 새겨져 있을 테니 교훈이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이번 70여편의 목록을 보면서 감독님의 유실된 대표작 <잡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그게, <잡초>가 그야말로 잘 찍혔다는 뜻은 아니오. 그래도 그 영화는 내가 미국영화를 흉내 내는 희망 없는 욕심을 자성하면서 비로소 한국영화를 찍자 생각하면서 한 영화요. 기왕에 내가 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작품의 성향을 확 바꿔서 한국영화, 한국 사람의 삶을 담아보자 했던 거라. 잘된 영화가 아니라도 한국 사람의 정서나 흥이나 삶의 리듬 이런 것들을 닮고자 무척 노력했던 작품이요. 그 뒤로 7~8년 뒤쯤에 <족보>를 찍으면서 겨우 나다운 영화를 만들어 낸 걸 보면 <잡초>의 시도가 잘 한 일이긴 한 것 같아요.
-회고전 자료를 보니 개인적으로 아끼시는 영화들을 언급하셨던데요, 그 중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불의 딸>(1983) 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것들보다 더 잘 찍힌 영화들도 있을 거요. 다만 그것들은 애써서 만들었는데 불쌍하게 취급된 내 자식들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작품들이지요.
-최근에 복원된 작품 <삼국대협>은 어떤 인상으로 남아 있으신지요.
=그런데 그게, 내 기억에 없는 영화예요. 갑자기 <삼국대협>이라는 영화가 어떻게 화제가 된 것인지…. 일본 사무라이가 나오고 무슨 칼질도 하고 하는 영화겠구나, 하는 정도예요.(웃음)
-영화제 동안 이창동, 홍상수, 봉준호 등 후배 감독들과 관객과의 대화 자리를 함께 하게 됐습니다.
=내가 꽤 존경해 마지않는 그 감독들이 내 영화를 뜯어서 얘기하는 자리가 마련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당한 경지에 있는 그 감독들이 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무척 궁금하고 또 속으로는 너무 고맙지요.
-지금 준비 중인 차기작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훈 작가의 단편 소설 <화장>이 원작인데요, 어떤 점에서 마음에 드셨습니까.
=병 들어서 사위어가는 마누라를 지극한 정성으로 병수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또 젊고 싱싱한 여자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 사내에게는 우리가 밖으로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내밀한 욕구가 있을 거 아니요. 그렇게 내심 드러내기 부끄럽고 어려운 것들을 안고 살아가는 그런 부분들을 영화로 한번 담아 보고자 하는 거지요. 마음의 결을 찾아서 영상으로 옮겨보는 거 말이에요.
-소설을 영화로 옮기실 때 유의하시는 점들도 있을 텐데요.
=김훈 선생의 엄청나게 박력 있는 문장의 그 힘, 그거를 영상 안에 어떻게 옮겨 실을 수 있을까 하는 거, 그런 과제가 크단 말이지요. 김훈 선생의 글은 무슨 드라마틱한 극성이 빠져 있으면서도 문장 자체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어서 영화가 어떻게 그 압도적 힘을 영상에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게 문제예요. 무척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것이 나로서는 한번 대들어봐야겠다 하는 거지요.
-<화장>은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의 영화가 될 것 같으십니까.
=기왕에 해온 영화와 생판 다른 게 될 수밖에 없겠다 생각이 되는 게, 주인공 남자의 마음의 결을 따라서 영상화 할 것인데….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요. 정신적인 추이를 따라가 보는 거 말이요!